선경직물주식회사
1953년 창립 무렵의 선경직물. 고 최종건 창업회장은 한국전쟁 중 폐허가 된 선경직물 건물을 복구해 재건하기로 결심, 건물 복구와 흩어진 부속품을 모아 직기를 재조립했다. /SK 제공

'선만주단'·'경도직물' 조합
전시정비 '조선직물'로 흡수
수도권 최대 '인견직' 생산
제2공장 직보반 '조장' 승진
'차질없는 생산' 책임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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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직물은 1940년 10월에 수원역에서 서남쪽으로 2㎞가량 떨어진 수원시 권선구 평동 4에서 설립된 직물제조회사였다.

인구가 밀집한 평동은 일제강점기 때 대평정(大坪町)이라고 불렀다. 평동이란 이름은 이 일대가 너른 들판이었기 때문에 예전부터 벌말·벌리·들말·평리 등으로 불렸다.

공장 부지를 수원 시내에서 떨어진 벌말로 정한 이유는 이 동네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서호천의 풍족한 자연수가 공장용수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선만주단(鮮滿綢緞)과 경도직물(京都織物)이 공동으로 투자해 설립했는데 상호 '선경'은 선만주단과 경도직물의 머리글자인 '선'과 '경'을 조합한 것이다.

선만주단은 만주지역에 직물류를 수출하기 위해 1929년에 국내에서 설립된 일본인 포목상이었고 경도직물은 일본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견직물 제조업체였다.

>> 1944년 부친권유로 입사


간사이(關西) 혹은 긴끼(近畿) 지방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일찍이 아스카(飛鳥, 서기 552~645)시대부터 메이지유신(1868)에 따른 도쿄 천도 때까지 무려 1천300여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일본의 한국 및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였다.

선만주단은 공장 부지 8천평과 공장건축비 및 기타비용을 부담했으며 경도직물은 직기 및 부대설비를 각각 현물 출자했다.

중·일전쟁(1937~1945) 발발 이후 일본이 만주 일대를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일본상품시장도 덩달아 확대된 결과 중국 내에서 일본제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선경직물이 설립될 무렵에는 국내 섬유업계도 호황을 누려 전국적으로 수많은 군소 직물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제직은 기술습득이 비교적 쉬운 데다 적은 자본으로도 쉽게 손댈 수 있는 업종이었다.

선경직물은 제1, 2공장에 기모도식(木本式) 직기 100여대와 염색가공 설비, 보일러, 기숙사 등을 완비하고 종업원 200여명(남자 약 40명)으로 태평양전쟁 와중인 1943년 봄부터 인견과 시루빠(Silver)를 직조했다.

나날이 급증하는 수요에 부응해서 작업반을 주야 2교대로 편성해 24시간 가동했다.

SK그룹의 고(故) 최종건(1926~1973) 창업자도 이 무렵에 선경직물과 인연을 맺는데 계기는 다음과 같다.

최종건의 부친 최학배는 21세 때 결혼과 함께 바닷가인 수원군 팔탄면 해창리에서 수원 평동으로 이주, 그곳에서 대성상회를 개설하고 수원잠업 시험장에 볏짚과 왕겨 등을 납품하는 한편 미곡상을 겸영했다.

이재에 밝아 사업이 번창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선경직물공장을 건설할 때는 골재와 자재류를 납품하기도 했다. 

 

>> 수원소재 6개 공장 개편


최종건은 1926년 최학배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수원 평동 7에서 출생했다. 수원 신풍소학교를 거쳐 1944년 4월에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선경직물의 공무과 견습기사로 입사했다.

당시 그는 3급 기계정비사 자격증도 소지해서 취직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나 부친의 권유로 집 근처에 있는 선경직물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선경직물은 1944년 8월에 수원의 다른 직물공장들과 함께 '전시기업정비령'에 의해 조선직물로 흡수됐다.

조선직물은 1934년에 안양에서 설립된 인견직 전문생산업체로 부지 4만1천평, 건물 9천100평으로 수도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직물공장 중의 하나였으나 안양공장은 일본 군용 항공기제조창으로 징발당했다.

전황이 일본군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총독부는 방산시설 확충차원에서 강제로 기업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이다.

대신 조선직물은 수원에 산재해있는 직물공장들을 전부 접수했는데 당시 수원에는 선경직물 외에 선일직물공장, 수원직물공장, 동흥직물공장 등 6개 공장이 있었다.

조선직물은 이들 직물공장을 접수함과 동시에 선일직물을 제1공장으로, 선경직물을 제2 공장으로 개편했다.

이 무렵 최종건은 직보반 제 2조장으로 승진됐다. 2조장은 100여명의 제직조 여공들을 통솔하면서 주·야간 교대작업반을 편성, 운용해야 하고 생산계획을 차질 없이 수행해야 하며 또한 품질관리도 책임져야 했다.

제직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