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은 돌고 돌아야 한다고 해서 '돈'이다. 돌지 않으면 돈이 아니다. 전 세계 지폐 중 가장 비싼 500유로화(약 68만원)는 돈이지만 돈 대접을 받지 못한다. 너무 고액권이라 돌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사람도 500유로를 직접 본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500유로에 '빈 라덴'이란 별명이 붙었다. 여행 중 500유로짜리를 건넸다가는 눈총을 받기 일쑤다. 앞뒤를 꼼꼼히 살펴보거나 빛에 비춰보기도 한다. 아예 받지 않는 상점도 꽤 많다. 500유로는 주로 테러 및 범죄은닉 자금 등으로 이용됐다. 올 초 유럽중앙은행이 500유로 발행을 중단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처럼 고액권은 거래 수단보다는 가치 저장 성격이 강하다. 시중에 유통되는 것보다 금고로 들어가는 게 더 많다는 의미다. 경제 규모가 클수록 고액권 비중이 높다. 통화 확대 시 고액권이 많을수록 화폐 유통 속도가 느려져 물가 부담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우리나라 최고액권 5만원이 23일이면 태어난지 꼭 10년이 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말 현재 유통 중인 5만원권은 98조2천억원으로 금액 기준으로 전체 은행권(지폐)의 84.6%를 차지했다. 시중에 유통되는 지폐 10장 중 4장이 5만원권이다. 하지만 환수율은 여전히 낮다.
5만원권 환수율은 2010년 41.4%에서 2014년 25.8%로 낮아졌다가 2015년엔 40.1%로, 지난해 67%로 높아졌지만, 1만원권(107%), 5천원권(97%), 1천원권(95%) 대비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런 탓에 5만원권이 지하경제로 흘러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5억원을 1만원권으로 가득 채우려면 사과 상자가 필요했지만, 5만원권은 007가방 하나면 충분하게 됐으니 수뢰의 편의성(?)을 높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각종 뇌물수수나 비자금 조성 등 부정부패 사건이 드러날 때 5만원권을 가방이나 쇼핑백 등에 담아 전달했다는 수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런 우려 때문에 발행을 앞두고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2006년 국회에서 발행촉구 결의안이 의결되고서도 무려 세 해를 넘기고야 빛을 보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 이제 5만원권의 입지도 크게 바뀌었다. 경조사비용 인상의 '주범'이란 소리에도 불구하고 2009년생 5만원권은 1973년생 1만원권을 누르고 우리 일상생활에서 가장 사랑받는 돈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