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폐허 속에서 선경직물을 창업한 것이 SK 역사의 시작이었다. /SK 제공

죽마고우 박윤환과 '수리'
부품없어 잦은 고장 '애로'
공장 전체부지 1만2천평중
차철순 지분 4천평 先매입
귀속재산 공동명의로 제출
2019062401001651200081242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계기로 선경직물은 여타 일본인 소유의 기업들처럼 미군정청에 귀속되면서 관리인(경영책임자)에 황청화와 서울 마포의 거상(巨商)인 김덕유가 임명됐다.

당시 이들은 한국인으론 유일한 선경직물의 주주였다.

황청화와 김덕유는 총 주식 50만주(액면가 1 원(圓)) 중 각각 100주씩을 소유한 군소주주에 불과했으나 미군정법령 '적산관리요령'의 내용 중 '적산업체의 주주 또는 당해 적산업체에서 5년 이상 근속한 자에게 관리인 자격을 부여한다'는 조항에 따라 선임됐다.

귀속기업체들의 관리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이권으로 치부돼 경쟁이 치열했는데 차후 적산기업체들의 헐값 민간불하에 관리인들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적산기업 불하는 해방 후 국내 기업가 배출의 최대 루트였다.

>> 한국전쟁 '공장 폐허'

선경직물은 1946년 2월부터 조업을 재개했는데 공장장은 황청하의 동생 황철하가, 총무부장에는 김덕유의 조카 표덕은이, 생산부장에는 21세의 청년 최종건이 각각 임명됐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 경영자들이 철수함으로써 선경직물 공장의 기계설비 및 원재료의 안전관리가 초미의 과제였다.

당시 일본인 소유 공장의 경우 한국인 근로자들이 자주관리 형식으로 운영됐으나 기술 및 원료부족에다 좌우익의 대립으로 공장경영이 원활하지 못했던 터에 절도마저 기승을 부린 탓이었다.

선경직물에선 자체경비를 위해 선경치안대를 결성했고 최종건이 주체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 공로를 높이 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부터 직물업계의 호황으로 선경직물의 경영도 활성화됐다. 해방을 계기로 국내 일본계 기업들의 동시적인 생산중단에다 일본으로부터의 수입 또한 단절돼 물자난이 극심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8년부터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送電)을 중단함으로써 선경직물은 동력원을 확보하지 못해 조업에 차질을 빚었다.

1949년 여름 최종건은 선경직물을 퇴직하고 방직원료인 원사 거래로 재미를 보다가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산으로 피난했다.

최종건이 1952년 5월에 수원으로 돌아왔을 때 선경직물 공장은 전화(戰禍)를 입어 거의 폐허 상태였는데 관리인 황청화와 김덕유는 선경직물의 관리 책임을 포기한 상태였다.

시설들을 점검한 결과 직기 10~20여대 정도는 수리하면 사용이 가능한 상태였다. 최종현은 벌말의 죽마고우인 박윤환과 함께 고장 난 직기들을 재조립했다.

부품들이 모자라 억지로 조립해 가동을 시도했으나 잦은 고장으로 애로가 많았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최소경제운용단위인 직기 20대를 갖추었다.

>> 방구현·차철순과 추진


최종건은 방구현, 차철순과 함께 공동으로 선경직물 불하작업을 추진했다. 방구현은 최종건이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람으로 해방 후에는 많은 적산을 불하받아 큰돈을 벌어 '수원한량'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다.

선경직물 공장부지 1만2천평 중 차철순의 지분 4천평을 우선 매입한 다음 귀속재산 우선 매입원을 차철순과 공동명의로 제출하기로 했다.

선경직물은 설립 당시 차철순의 땅 1만2천평을 공장부지용으로 매입했는데 8천평에 대한 대금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5년 이내에 지불하기로 한 터여서 4천평은 여전히 차철순의 지분으로 등재돼 있었던 것이다.

또한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농지를 매수당한 자에게 귀속재산 매수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귀속재산 불하 규정이 있어 차철순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로써는 귀속재산 매각통지서를 손에 넣는다는 것이 곧 큰 행운을 잡는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귀속재산을 불하받아서 손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속재산은 으레 시가보다 싼 값에 매각되기 마련이었으며 매수대금도 5년 내지 15년까지 장기분납이 가능했다. 매수계약금에 해당하는 1차 납부금도 매수총액의 10분의 1만 납부하면 됐으며, 게다가 매수대금은 액면가보다 훨씬 싼 값에 살 수 있는 농지증권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치솟는 인플레로 화폐가치가 자꾸 떨어지기 때문에 귀속재산을 불하받는다는 것은 횡재나 다름없었다."('선경40년사<약사>', 378면)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