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는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백범은 1949년 6월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그러니까 백범 서거 47주년이 되던 1996년 6월26일, 경인일보 지면에 백범 암살범 안두희의 인터뷰가 실렸다. 당시 그는 인천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나이 80에 치매까지 겹쳐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해 누워지내던 터였다. 민족반역자로 낙인찍혀 숨어 살면서 신분노출을 극도로 꺼리던 그였다. 더구나 1992년 2월 민족정기구현회 회장인 권중희씨가 벌인 납치 사건 이후엔 아예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 왔다.
구차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지만 안두희는 '애국자는 죽고, 반역자는 살아남았다'는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입증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런 안두희에 대해 인터뷰가 성사됐다는 소식에 편집국이 술렁였던 기억이 새롭다. 그는 앞서 여러 경로를 통해 국내 암살 배후세력과 미국의 사주를 암시하는 내용의 진술을 한 바 있지만 수시로 이를 뒤집기 일쑤였다. 그의 나이나 건강상태로 볼 때 그 인터뷰는 사실상 백범 암살의 진실을 밝힐 마지막 기회였다. 굳게 닫힌 입을 열게 하는 고도의 인터뷰 기술이 필요한 만큼 인터뷰는 연륜 있는 베테랑 선배가 맡았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원하는 국민들의 염원을 또다시 외면했다. 백범 암살 배후를 묻는 질문에 그는 "내가 안죽였다. 미국이 죽였다"고 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는 듯 했다. 하지만 국내 배후세력에 대해선 "나 혼자 죽였다"며 끝내 입을 다물었다. 당시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분노와 함께 역사의 진실을 밝힐 시간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4개월여가 지나 안두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정의봉'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몽둥이에 맞아 숨진 것이다. 한 택시기사에 의해 안두희가 생을 마감하면서 결국 경인일보의 인터뷰는 생전 안두희의 마지막 기록이 되고 말았다.
이제 암살범을 추궁하는 것도, 그에게서 증언을 기대하는 것도 먼 과거의 일이 됐지만 분명한 것은 진실을 찾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23년 전 작성된 기사에는 그 당위성을 압축한 문장이 나온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역사학자 콜링우드가 말했듯 '역사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이기 때문이다.
/임성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