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년 작. 감독은 시드니 루멧. 데뷔작이 이렇게 주목을 받기도 힘들다. 미국의 배심원제를 세밀하게 그려낸 법정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힌다. TV 드라마로 이미 검증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심만으로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정의가 내재한 '법의 정신' 덕을 톡톡히 봤다. 이는 당시 미국의 '시대 정신'이기도 했다. 증거보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한 소년을 살인자로 몰아가는 11명의 배심원 사이에서 유일하게 무죄 가능성을 버리지 않은 8번 배심원을 맡아 마침내 전원 무죄 평결로 이끌어 낸 헨리 폰다의 연기가 일품이다.
지난 27일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 군사기밀보호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A 씨 등 6명에 대해 항고심에서 "수사 혐의와 무관한 컴퓨터 저장장치, 서류철까지 전부 압수하여 가져간 다음 장기 보관하면서 이를 활용하여 별건 수사에 활용하는 경우 해당 증거들은 물론, 그 증거들에 기초하여 수집된 2차 증거는 모두 위법수집 증거로 증거능력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수사 기관의 관행이 된 '별건 수사'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법원이 선언한 셈이다.
독수독과(毒樹毒果)의 원칙이란 게 있다. 독이 든 나무에서 열린 열매 역시 독이 있다는 것으로,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증거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법에 이 이론이 도입된 것은 2007년으로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위법수집 증거능력 배제원칙을 명문화 했다. 하지만 우리의 수사기관은 그동안 독이 들어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원칙은 외면한 채 과실을 따 먹기에만 급급해 왔다. '별건(別件) 수사'가 그것이다.
별건 수사는 본래 수사 대상이 아닌 다른 사건을 조사함으로써 피의자를 정신적으로 압박해 범죄혐의를 얻어내는 수법이지만, 검찰권 남용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특히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 사건 조사에 자주 이용된다. 취임하는 검찰총장마다 별건 수사 관행 등에 대해 늘 개선 의지를 밝힌다. 하지만 이 '지독한' 수사 관행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수사를 받는 도중 극단적인 선택을 한 몇몇 인사가 '별건 수사'로 극심한 심적 고통을 느꼈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추정하고 있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단호하게 배제되어야 한다. 이제라도 별건 수사가 사라져 '법의 정신'이 꼭 지켜지길 기대해 본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