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당 서정주의 작품 세계는 전 생애를 걸쳐 크게 변화했다.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에서 원시적인 생명력을, 두 번째 시집 '귀촉도(歸蜀途)'는 인간의 슬픔이 주조를 이룬다. '신라초(新羅抄)'에선 동양사상을, '질마재 신화(神話)'에서는 '이야기꾼'으로 변모한다. 그러던 그가 세계 여행의 체험과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1992년 세계의 산 이름을 소재로 '산시(山詩)'를 선보였다. 산 만 가지고 풀어쓴 시로 "역시 미당!"이란 탄성이 나온다.
미당이 산으로 시를 썼다면 인물로만 시를 쓴 시인도 있다. 시인 고은이다. 1980년 여름,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육군교도소 특별감방과 대구교도소에 갇혀 있는 동안 역사와 시대를 관통하는 유·무명 인물들에 대한 시를 구상해 1986년부터 계간지 '세계의 문학'에 연재를 시작했다. 2010년까지 20여 년에 걸쳐 시집 30권에 총 4천1수를 수록하여 발간했다. 많은 사람에 대해 적은 기록이란 뜻의 '만인보(萬人譜)'다.
한국사의 역사적인 인물들부터 어린시절 친구, 이웃들까지, 등장하는 인물이 무려 5천600여명에 이른다. 시적 완성도에 대해선 여전히 엇갈리지만 자유와 해방, 민주와 민족의식을 불교사상에 근거해 내밀하게 다뤘다는 평가에는 이의가 없다. 세계 최초로 사람만을 노래한 연작 시라는 점에서 노벨상 후보에 오를 때 '만인보'가 거론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역사 속 인물들을 시로 조명해 온 이오장 시인이 월간 '시' 7월호에 발표한 '인물시'가 큰 화제다. 정파를 가리지 않은 3행의 짧은 시.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시인의 쓴소리에 33인 정치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전·현직 대통령이라고 예외는 없다. "안개 강 하나 건너와 옷깃 터는가/자연은 돌고 돌아 제자리에 오는 것/그대가 받들어야 할 자연은 국민이다." ('문재인' 전문) "이 세상 모든 것은 공주가 갖는 것/공주의 모든 것은 부마가 갖는 것/부마 없는 공주는 국민이 부마." ('박근혜' 전문)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는 산물이다. 압축된 언어에 은유와 풍자가 가미한 시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정치의 꼴'이라는 형태의 '정치 시' 실험을 하는 이 시인의 소망은 단 하나, "정치인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 우리의 바람도 그래서인지 짧은 시지만 그 울림은 크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