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서 출생 유년시절 보낸 20여년
문학적 상상력·정서 길러줬던 시간
1·4후퇴땐 산·해·돌 통해 생명 노래
수백편 시·산문과 수석·글씨·그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전시회서 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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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경기도 안성의 박두진문학관에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박두진문학관은 박두진 선생의 문학사상을 널리 알리고 기리며, 박두진 관련 자료의 체계적 수집과 보존을 목적으로 작년 11월에 개관했다. 문학관은 상설전시 코너에서 선생이 펴낸 시집을 통해 그의 시적 생애를 조감할 수 있게 했으며, 선생이 남긴 수석과 글씨와 그림 등 다양한 예술분야의 결정(結晶)들을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선생은 1916년 3월 10일 안성군 안성읍 봉남리 360번지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네 살까지 그곳에 살다가 안성의 가터, 양협을 거쳐 고장치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안성에서 살던 20여년은 선생의 문학적 상상력과 정서를 길러주었던 시간이었다. 선생이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경기도 안성의 '고장치기' 마을은, 들판 한가운데 스물 남짓한 오두막집이 엎드려 있는 쓸쓸하고 가난한 곳이었다. 그 마을에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박두진 형제들 정도였다. 선생의 집도 농가는 아니었지만 댓 마지기 남의 땅을 소작하며 가난한 생활을 했다. 방학이 되면 지게를 얻어 지고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가곤 했던 어린 박두진은, 새소리 물소리를 따라 혼자 산골짜기를 들어가며 소박한 자연에 대한 강렬한 애착과 신비한 교감을 얻었으며, 고독에 대한 강한 매혹과 영원한 나라에 대한 동경을 배웠다고 한다.

선생은 청룡산의 높고 푸른 산줄기와 사계절 내내 부는 사갑들의 바람을 헤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침엔 모래 반, 흙 반의 신작로를 따라 안성읍내의 학교로 향했고 돌아오는 길엔 굽이쳐 흐르는 안성천을 지나 사갑들로부터 청룡산 줄기까지 풀숲을 헤치며 자연과 교감했다. 선생은 고장치기에서 일인 지주의 농토를 소작하면서 일제의 수탈을 경험했으며 기나긴 밤 등잔 아래서 독립운동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시선과 민족의식을 길렀다. 고장치기에서의 경험은 선생의 문학사상을 만들어준 토대였던 것이다. 열여섯 살부터 습작을 시작하여 '아(芽)'라는 동인지에 동시 등을 발표하곤 했던 선생은, '시'야말로 신(神)이 인간에게 준 은총이며 시로써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신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이 시기부터 강하게 가졌다 한다. 선생은 우리 현대시가 너무 감상적, 퇴폐적이고 경박한 외래 취향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보다 더 스케일이 크고 싱싱한 야성의 시를 쓰리라 마음먹었다.

서울에서 살던 선생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피난을 왔다. 안성에 머무는 동안, 검문에 걸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고 1·4후퇴 당시 대구로 피난한 뒤에는 '창공구락부'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때로부터 선생은 '산'과 '해'와 '돌'을 통해 생명과 정열을 줄곧 노래하였고, 그것들을 통해 보다 더 밝은 앞날을 예견한 예언자적 시인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 의지의 실현이자 유토피아에 대한 강한 충동의 시적 형상화였다. 선생이 타계하고 난 후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던 말년의 작품들은 유족과 친지들에 의해 '당신의 사랑 앞에'라는 시집으로 꾸며졌는데, 거기에는 우리를 영원과 믿음에 대한 사유로 이끄는 높은 정신의 언어가 하나의 완결된 화폭으로 담겨 있다. 그렇게 선생의 언어는 지금 고향 안성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혜산 박두진 문학제'를 통해서, '청록파'라는 유파를 떠나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의 권역을 이룬 대가 시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안성 금광면에 작은 조립식 집을 마련한 뒤부터는 주소를 안성에 두고 매주 안성에 머물며 수백 편의 시와 산문을 썼다. 특히 시적 관심을 사람과 신앙, 수석에 기울인 이후부터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와 산문에 담아 펼쳐냈다. 그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마음이 박두진문학관에서 열리는 '박두진 서재에서 찾은 문학유산' 전시회에서 웅성거리고 있다. 선생이 소장했던 백석 시집 '사슴'을 비롯한 근대문학 유산을 실물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연말까지 지속될 것이다. 선생의 마음과 흔적이 물씬 묻어나는 문학사의 한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