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영혼 바뀌는 체인지담·현대판 귀신담…
노골적 판타지 '황당무계식' 시청률에 매몰
미드·일드 베낀 '비현실' 다뤄 안타깝기만
은유하고 보듬고 해학있는 작품 만들어야


춘추칼럼/김종광 소설가
김종광 소설가
한국드라마는 끝없이 비현실로 치닫고 있다. 옛날엔 보통사람의 현실을 담백하게 다룬 드라마도 꽤 했다. 연예인들이 뭔가를 하는 소위 '예능'프로, 일반인의 삶을 보여주는 '리얼다큐', 연예인과 일반인이 함께 나오는 '리얼예능'. 실상은 연출이거나 '악마의 편집'이더라도 그 '리얼'을 표방하는 프로들이 득세하는 것에 비례해, 드라마는 '현실'로부터 멀어졌다.

몸이나 영혼이 바뀌는 체인지담, 시간·공간 이동담, 현대판 귀신담, 초능력 히어로담…. 이런 노골적인 판타지에 시청자는 익숙해졌다. 저게 말이 되냐고 따지는 이는 드물다. 그 어떤 판타지도 없으면 시청률이 바닥이다. 드라마는 으레 황당무계한 것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진 듯하다. 드라마의 만화화라고 해야 할까.

물론 괴력난신(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을 이르는 말)이 전혀 없는 드라마도 있다. 그렇지만 그 '현실적인' 드라마도 판타지다. 비극적·엽기적 출생의 비밀, 갑작스러운 중병의 발발, 못된 부자와 착한 서민의 운명적인 로맨스, 이중삼중사중의 짝짓기 연애, 정의로운 '사'들의 징치…. 전통적인 설정만으로 시청률이 나오지 않으니, 5대 강력범죄가 난무한다. 만약 드라마가 현실의 반영이라면, 한국은 폭력·절도·성범죄·강도·살인이 비일비재하는 무법 천국이나 다름없다. 재벌은 사업에 힘쓰기는커녕 끔찍한 사고나 저지르고, 공권력은 범죄자와 결탁되어 있고, 그래서 범죄는 은폐되기 십상이고, '사'들도 거의 다 악당이고, 흙과 물에 억울한 희생자가 묻혀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범죄가 발생 중이다. 정의로운 영웅의 목숨을 건 활약이 없다면 구제불능이다.

한국이 얼마나 정의롭고 안전한데. 한국인이 얼마나 훌륭하고 이타적인데. 한국재벌이 얼마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인데. 드라마 만든 사람들, 애국심이 없네. 저런 사상이 의심스러운 드라마를 만들다니.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해서 발칵 뒤집히고는 하지만,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을 가지고, 만날 일어나는 것처럼 호도하다니 불순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시청자가 있다면, 거짓말인 걸 알고 보는 괴력난신류보다 강력범죄드라마가 더 충격적인 판타지일 테다.

전혀 판타지 같지 않은 드라마도 판타지일 수도 있다. 훌륭한 의료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낭만닥터 김사부'와 '병원선', 지구대 경찰의 애환을 그린 '라이브', 감옥도 살만한 곳이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어안이 벙벙한 '슬기로운 감빵생활'. 근래에 참 보기 드문 '리얼한' 드라마들이다. 하지만 일선 의료인과 지구대 경찰과 교도소 경험자에게 그 드라마들은 얼마나 사실적일까? 어쩌면 예능과 다큐의 '리얼'도 조작된 드라마일지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리얼'이 괴력난신 판타지보다 어처구니없을 수 있다.

판타지의 극한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최근 방영 중이다.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리고 대통령 포함 정부 요인 수백 명을 한꺼번에 죽인 '60일, 지정생존자'. 알다시피 미드 '지정생존자'를 그대로 베꼈다. 아무리 베꼈다지만, 한국에서 국회의사당을 날리다니! 미드에서는 총질이 자유로운 나라여서 그런지 정말 많이 죽는다. 한드에서는 웬만하면 죽지 않는다. 귀신인지 좀비인지는 미드처럼 죽여도, 감히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못했다. 그런데 '60일, 지정생존자'는 갑자기 수백 명을 죽여버린 것이다. 미드 수준을 한 방에 따라잡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드라마의 '비현실'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미드에서도 베꼈지만, 일드에서도 많이 베꼈기 때문이다. 일본만화, 일본소설을 대놓고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와 영화도 수두룩하고, 한드에 일본에서 빌려온 판타지가 가득하다는 건 불편한 진실이다. '비현실'이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닐 테다. 시청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아니, 판타지 없는 드라마는 이제 불가능하다. 하지만 왜 꼭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데만 애쓰는 걸까. 판타지라도 은유하고 풍자하고 보듬고 해학이 있고 의미가 있는, '말이 되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

/김종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