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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눈만 뜨고 있을 뿐, 한 번도 깨어있는 느낌이 들어 본 적이 없어." (델마) "이제야 진정한 나 자신을 되찾았어." (루이스) 이런 대화가 스스럼없이 오가는 영화. 지금 같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영화가 제작된 1991년을 상기하면 사정이 조금 다르다. 리들리 스콧의 '델마와 루이스'는 껌 씹듯 폭력을 행사하는 근육질 남자 배우들이 판을 치던 할리우드 영화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고 여성의 존재를 부각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그동안 영화에서 여성은 그저 성적 대상, 지켜줘야 할 보호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델마와 루이스'는 달랐다. 남성의 폭압을 거부하는 여성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 감독은 그들의 대화 하나하나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았다. 메시지가 하도 강렬해 진정한 페미니즘 영화의 서막을 알렸다고 평가받는다. 그랜드 캐니언 계곡으로 질주하는 엔딩신은 영화사에 길이 남는 장면으로 꼽힌다. 특히 그들의 마지막 대사. "우리 잡히지 말자! 계속 가는 거야! 가자! 밟아!" 여성을 이렇게 강렬한 캐릭터로 묘사한 영화는 그동안 없었다.

델마와 루이스를 범죄자로 만든 건 남성들의 악행이 원인이며, 남성들이 선한 존재라면 그녀들이 죄를 지을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영화는 항변한다. 이 영화 이후 미국 사회에서 여성 억압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됐다. 영화도 크게 변했다. 레니 할린의 '롱 키스 굿 나잇'에 이어 리들리 스콧은 '지 아이 제인'에서 해병대 전사 데미 무어를 등장시킨다. 여성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이제 '여성 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는 셀 수 없이 많다.

마침내 남성 배우 전유물이던 007 제임스 본드 역이 여성에게 넘어갔다. 25번째 007시리즈 '본드 25'(가제)에 흑인 여성 배우 샤나 린치가 낙점됐다는 소식이다. '역대 가장 매력적인 제임스 본드'로 불리던 6대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는 퇴진하고, 여성 본드가 007 살인면허를 부여받는다. 외신은 '팝콘을 쏟을 만한 깜짝 뉴스'라고 전하고 있다. 백인이 주름잡던 배역에 흑인이, 그것도 여성이 남성의 아성이던 007역을 가져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낯설고 어색해도 어쩔 수 없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여성 본드의 등장이 인종 및 성차별을 바로잡는 취지라지만, 하늘나라에서 원작자 이언 플레밍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게 궁금하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