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다양한 화폐 고유한 문화적 특성
지역 주민의 철학과 가치관 내재돼 있어
어떻게 설계 했으며 무엇을 배려 했는지
인천지역화폐엔 고민·성찰 찾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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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환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장
지역화폐의 원형은 영국의 선구적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이 고안한 '노동증서'다. 사회주의(socialism)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 협동조합운동을 창시한 오웬은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과 복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가치를 노동시간으로 환산해 노동증서를 발행해주면 이를 다른 구성원이 제공하는 물품이나 서비스와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고안했다. 화폐와는 별개였다. 이를 위해 1832년 런던에 전국등가노동교환소까지 설립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지역화폐 '레츠(LETS :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도 이 노동증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로부터 150년 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코목스밸리의 작은 마을 커트니(Courteney)에서 발행된 지역화폐가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출발점은 열악한 경제상황이었다. 지역에 있던 공군기지가 이전하고, 마을주민들의 생계수단이던 목재산업이 침체하면서 실업률이 18%까지 치솟았다. 빈곤과 궁핍이 마을을 휩쓸었다. 한 세기 반 전 영국의 노동자들이 처했던 상황과 똑같았다. 이 마을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마이클 린턴이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돈이 없으니까 노동을 해주고 물품을 받는 형태의 가치교환이었다. 곧 컴퓨터를 이용해 거래관리시스템을 개발했다. 회원으로 가입한 지역주민들이 이를 이용해 노동과 물품과 기타 서비스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1983년 '레츠'의 태동이다.

현재 전 세계 지역화폐는 3천여 종에 이른다. 이름도 '레츠', '녹색달러', '페이퍼', '타임달러' 등 지역별로 다양하다. 당초 노동과 물품의 등가교환 개념이었던 지역화폐는 시간이 흐르면서 본래의 역할에 충실한 '공동체 통화(community currency)'와 현금적 성격이 강화된 '지역 통화(local currency)'로 나눠지게 된다. 일본만화 '아톰'의 탄생지인 도쿄 다카다노바바에서 2004년 탄생한 '아톰 통화'는 지역, 국제, 환경, 교육 등 4개의 주제와 관련된 사회공헌활동에 참가한 주민들에게 지급되고 있다. 동일본대지진 피해지역에선 재해복구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도 성공한 사례로 손꼽히는 영국 최대의 지역화폐 '브리스톨 파운드(Bristol Pound)'는 영국의 법정화폐인 '파운드'와 등가교환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현금성 지역화폐다.

특히 '브리스톨 파운드'는 올해 돌연 대한민국 지역화폐의 총아로 떠오른 '인천e음카드'와 비교해서 살펴볼 만하다. 브리스톨은 영국 남서부의 경제를 책임지는 중심도시로 2018년 기준 46만명인 인구는 주변부까지 합치면 100만명에 이른다. 이곳에도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금융위기의 짙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브리스톨 파운드'는 불안정한 세계경제에 대한 각성과 대응의 차원에서 이듬해인 2009년 출범했다. "우리 도시의 경제시스템이 우리의 지역경제에 위해를 가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공동체들로부터 부를 짜내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환경을 손상시키고, 불평등을 영속시키며, 인식할 수 없는 복제품들로 시내 중심가를 동질화시키고 있다. 이에 우리는 2009년 초, 한 식당 테이블에 모여앉아 뭔가를 하기로 결정했다. 브리스톨 파운드는 우리가 사는 방식과 돈을 받고 일하는 방식을 재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가 주도하는 운동으로서 설립됐다" 그들이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는 출범의 취지다.

전 세계 여러 국가 여러 지역의 다종다양한 지역화폐에는 저마다 고유한 문화적·인구적 특성, 그리고 지역주민의 철학과 가치관이 내재돼 있다. '브리스톨 파운드'의 슬로건 '우리의 도시, 우리의 화폐(Our City Our Money)'에는 그들이 왜 지역화폐를 생각해냈고, 어떻게 설계했으며, 무엇을 배려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녹아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천의 지역화폐에는 어떤 철학과 가치관이 내재돼 있는가? 어떤 고민과 성찰이 녹아들어가 있는가? 안타깝게도 인천의 지역화폐 'e음카드'에는 슬로건이 없다.

/이충환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