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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초상화.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전시회
'怪의 아름다움' 부제… 관람객 북적
당대 '동아시아의 문화 아이콘' 명성
작품 보기위해 1천㎞를 달려온 남성
"직접보니 친절하다는 느낌 받았다"


7월 하순, 베이징의 여름도 인천·경기만큼이나 펄펄 끓었다.

그 베이징에 강력한 추사(秋史)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을 쐬러 1천㎞를 달려온 이가 있었다.

지난 23일 오후 2시 베이징 중국미술관 5층 전시장.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淸朝文人)의 대화'란 타이틀로 추사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입구의 안내판과 전시회 소개글이 중국어와 한글로 되어 있었다. 이곳이 중국이라는 생각을 잠시 잊게 했다. 그랬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인이었으나 중국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에게서 배우기도 했다.

또한 중국인들을 가르쳤고 후대의 일본인을 추사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동아시아의 문화 아이콘이었다.

지금 말로 한국과 중국, 일본에 광팬을 거느린 진정한 의미의 '한류 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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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작품 전시장 메인 알림판이다. 추사의 대표작 '계산무진(谿山無盡)'에서 '계산'만을 따서 디자인했다. 현대 중국인들도 추사의 글자를 자유자재로 배치하고 형태를 잡는 조형감각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베이징/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전시장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작품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한 남성이 있었다. 그는 한 작품을 여러 장 카메라에 담았다.

가까이에서도 멀리서도, 높낮이를 달리해 가면서도 찍었다. 수많은 관람객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왜 그렇게 관심을 갖는지 궁금했다.

그 남성은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왔다고 했다. 베이징에서 무려 1천㎞ 가까이 떨어진 곳이다. 중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추사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왔다고 했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는데 우한의 화중과학기술대학에서 역사와 예술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김정희는 청나라 시기에 중국과도 교류했는데 여기에 와서 김정희의 작품을 보니 무척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이런 전시가 자주 많이 중국에서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추사의 작품이 '친절하다'는 얘기는 무슨 의미일까. 추사의 작품 세계가 파격적이면서도 어렵지 않다는 걸로 들렸다.

'괴(怪)의 아름다움'이란 부제를 달고 열리는 이번 중국에서의 추사 작품 전시회는 지난 6월 18일 개막했으며, 오는 8월 23일까지 계속된다. 중국미술관 관계자는 1개월 이상 된 추사 전시장에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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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 속에서도 5층 추사 전시장에는 한국에서 건너 온 작품들을 보려는 중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베이징/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지난봄 추사 김정희 평전을 새로 펴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추사의 작품 세계가 그만큼 깊고 넓다는 얘기다.

추사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는데 말년은 경기도 과천에서 보냈다. 과천에 추사박물관이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추사는 한국문화사의 위인 중 위인이다.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필 중 한 분으로 꼽힌다. 작가적 개성이나 작품의 양, 대중적 인지도 등을 놓고 보면 단군 이래 최고의 서예가라고 유홍준 교수는 추사를 평가한다.

추사는 경기도 과천의 인물이기도 하다. 제주와 북청, 두 차례의 유배를 마친 이후 서거하기까지 4년여를 과천에서 지냈다.

과천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그보다 한참 전인 1824년 생부 유당 김노경(1766~1837)이 과천 옥녀봉 기슭 검단 아래에 과지초당 터를 마련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김노경이 중국학자 등전밀(1795~1870)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 그 내막이 보인다. 이는 과천문화원이 2008년에 발간한 '추사 자료의 귀향'에 나와 있다.

'저는 노쇠한 몸에 병이 찾아들어 의지가 갈수록 약화되는데 직무는 여전히 번잡해서 날마다 문서에 파묻혀 있습니다. 요사이 서울 가까운 곳에 집터를 구해서 조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했는데 자못 장원의 풍모를 갖췄습니다. 연못을 바라보는 위치에 몇 칸을 구축해서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 이름했습니다. 봄이나 가을 휴가가 날 때 적당한 날을 가려 찾아가 지내면 작은 아취를 느낄 만해서 자못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합니다.'

과지초당을 마련했을 때가 김노경의 나이 59세였고, 추사는 39세였다.

이 과지초당을 마련하는 일을 실질적으로 추사가 맡았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추사는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과지초당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만년의 4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때 추사의 예술적 성취도 원숙하게 익었다고 할 수 있다. 추사는 과천시기에도 공부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오랜 벗들과 특히 연경학계와 교류도 지속했다.

추사는 과지초당에 머물던 때 직접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셨다고 한다. 독(항아리)을 묻어 우물을 만들었기에 독우물 또는 옹정(甕井)이라고 부른다. 이 우물은 과지초당과 함께 과천에 있는 추사 관련 유적으로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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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재 한국고서협회 수석부회장(왼쪽)이 중국미술관 관계자와 추사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명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베이징/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유홍준 교수 "단군 이래 최고" 극찬
2차례 유배 굴곡… 말년 과천서 보내
인천도 가천박물관 '藥殿' 현판 소장
뭉게구름·삼지창·튼튼한 다리 형상
씩씩하게 병 이겨내라는 주문 같기도


인천에도 귀중한 추사 작품이 한 점 있다. 가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추사의 '약전(藥殿)' 현판이다. 의약 관련 기관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추사의 글씨를 양각으로 새기고 파란색의 안료를 칠했다.

이 현판이 어디에 달려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글씨의 형태가 무척 흥미롭다. 추사 특유의 현대적 디자인 감각이 꿈틀댄다.

글자의 모양이 마치 신통하고 영험한 약효를 얻어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약(藥)' 자에는 희망의 뭉게구름과 삼지창을 배열시킨 형태다.

'전(殿)' 자 역시 마찬가지다. 튼튼한 두 다리로 걷는 사람과 커다란 삼지창을 형상화 했다. 아픈 환자가 삼지창으로 죽음의 기운을 몰아내고 씩씩하게 걸어나가라는 주문 같기도 하다.

의료 기관에 꼭 들어맞는 디자인이다. 도안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추사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궁리했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이번 중국미술관 추사 전시에서는 추사의 학예일치와 유희삼매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걸작과 자료 87건이 처음 공개되었다.

이번 전시는 '괴(怪)의 미학'을 키워드로 추사체의 성격 전모를 19세기의 한·중은 물론 동아시아와 세계라는 공간에서 바라보도록 구성했다. '학예일치(學藝一致)' '해동통유(海東通儒)' '유희삼매(遊戱三昧)' 등 총 3부로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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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글씨 '약전(藥殿)' 현판. 의약과 관련된 건물에 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글씨의 조형미가 자못 흥미롭다. 인천 연수구 소재 가천박물관 소장 유물이다. /가천박물관 제공

학예일치 섹션에서는 청나라 옹방강(1733~1818), 완원(1764~1849)의 실사구시 입장의 경학과 금석고증학을 역사와 서법을 하나로 완성해 내는 지점에서 바라보게 했다. 추사와 청조문인과의 교유 관계 핵심 작품들을 전면에 배치한 이유이다.

해동통유 섹션에서는 제주 유배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유마거사를 자처하면서 유불선을 아우르는 통유로서 추사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 유희삼매 섹션에서는 특유의 추사체가 발산하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미학적 정수를 보여준다.

중국미술관 추사전은 한·중 우의와 동아시아 예술의 미래를 학예 역사의 재발견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번 행사를 마련한 예술의 전당 측은 "한·중은 늘 지리적 역사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근현대 100년간 식민지 서구화 과정에서 국가 간 예술교류프로젝트로서 개최되는 본격적인 전시로는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마침 올해는 1809년 추사가 베이징을 방문한 연행(燕行) 시기로 따지면 210년이 된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12월 5일부터 지난 2월 17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마련했던 청나라 말엽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받는 치바이스 작품전의 교환전 형식으로 마련되었다.

베이징/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