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대립하던 1894년 10월의 프랑스.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 우편함에서 군사 기밀이 담긴 편지가 발견됐다. 프랑스 육군 정보부는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간첩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드레퓌스가 "나는 결백하다"고 항변했지만, 비공개 군법회의는 그에게 종신형을 내린다. 단지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톨릭과 개신교, 진보와 보수를 둘로 가르며 프랑스 지성계를 들끓게 한 '드레퓌스'사건이다.
1898년 1월 13일 소설가 에밀 졸라는 클레망소가 편집장으로 있던 '로로르'지에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해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비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졸라는 "드레퓌스는 정의롭지 못한 힘에 자유를 빼앗긴 평범한 시민이다. 전 프랑스 앞에서, 전 세계 앞에서 나는 그가 무죄라고 맹세한다. 내가 40년간 쓴 글로 얻은 권위와 명성을 걸겠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앙가주망(Engagement) 즉 '지식인의 사회참여'의 전형으로 프랑스 지성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글로 많은 지식인이 시국선언에 동참했고 드레퓌스는 무죄로 풀려났다.
훗날 앙가주망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 건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였다. 그는 1945년 잡지 '현대' 창간사에서 "지식인을 대표하는 작가는 어떤 수단을 써도 시대에서 도피할 수 없다"며 인간해방의 기치 아래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1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알제리 전쟁 때, 프랑스군이 알제리인 포로들을 모질게 고문하자 프랑스 지식인들이 거세게 반발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서울대학교 교수로 복직하면서 '폴리페서(정치교수)'라는 비판이 일자 "앙가주망은 지식인과 학자의 도덕적 의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에 여론은 싸늘하다. '내가 하면 앙가주망, 남이 하면 폴리페서'라는 조롱 섞인 말도 나온다. 곧 있을 개각에서 법무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고, 조금 전까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조 전 수석의 앙가주망을 앞세운 자기변명은 어딘지 모르게 궁색하기 짝이 없다. '사이비 애국자들에게 항거하고 군부의 부당성을 공격하며 진실과 정의를 사랑했던 도덕주의자' 에밀 졸라가 조 전 수석의 말을 들었다면 뭐라 할까. '권력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과 감시 활동'이란 앙가주망의 뜻을 잘못 알고 있다고 웃었을 것이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