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가는 1931년 안익태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 동포들이 애국가를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부르는 것을 보고 작곡했다. 영감은 교회 국기 게양대에 나부끼는 태극기에서 얻었다. 곡은 1936년 베를린에서 완성돼 당시 올림픽 개막식에 선수단 일원으로 참가한 한국인 선수들과 함께 '응원가' 삼아 불렀다고 전해진다.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발자취와 수난의 역사를 그린 대서사시인 '코리아 판타지'의 후반부에도 삽입돼 1938년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됐다. 그 후 정부 수립과 동시에 국가로 정식 명명되었다.
애국가는 4·19혁명 직후 혁명시대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지만, 혁명국회의 산적한 현안에 밀려 흐지부지됐다. 그때는 곡보다는 '보우하사' '공활한데' '보전하세' 같은 어려운 가사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애국가 작사가는 윤치호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분명치 않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 시절에도 윤치호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있었지만, 김구 선생이 나서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라며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서 지금도 애국가 작사자는 공식적으로는 '미상'이다.
보수가 정권을 잡으면 수면 아래 있다가 진보가 정권을 잡으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애국가 논쟁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애국가 논란이 재점화됐다.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8일 국회에서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라는 제목으로 공청회를 하면서다. 이날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안익태의 친일 논란에 더해 표절 논란까지 제기하며 애국가를 더는 부르지 말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발도 크다.
애국가는 법적으로 '국가'로 명시돼 있지 않다. 공식행사에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노래로 불리며 사실상 국가의 지위를 지금까지 유지해 왔다. 이를 근거로 몇몇 정당이 공식행사에서 애국가를 부정한 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논란은 늘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났다. 단편적인 문제로 안익태를 평가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 우세했고, 특히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부터 여태껏 불린 애국가가 갖는 국민 정서상 공감대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분위기에 편승해 또 불거진 애국가 논란, 언제까지 이를 반복할지 착잡하기 그지없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