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이 사물로 바뀌는 '엑소더스'
변신하는 이유·진단 없는 '절멸'
한때 익숙하고 자명한 사실들
낯선 시선으로 돌아보게 해
현실세계 드리운 그늘 성찰 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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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지난 8월 3일부터 17일까지 동양예술극장 2관에서 '엑소더스'(이시원 극작, 연출) 공연이 있었다. '엑소더스'는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변신'을 재창작한 작품이다. 사람이 사물로 바뀌는 '변신'의 주요 모티프를 그대로 살리면서 에피소드를 추가하여 분량을 늘렸다. 이번 공연이 이전과 가장 달라진 점은 중장년층의 이야기에서 청소년의 이야기로 재창작한 것이다.

연극이 시작하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상황이 제시된다. 청소년이 사물로 바뀐다는 설정이다. 중앙변신대책관리본부로부터 상자에 담긴 머그컵을 전해 받은 어머니가 말한다. "컵이네요." 며칠이 지나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지만 왜 바뀌는지는 알 수 없다. 언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지도 밝혀지지 않는다. 중앙변신대책본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바뀐 물건의 신원을 확인해 가족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전부이다.

청소년들은 스마트폰, 운동화, 스티커, 자전거, 피아노, 의자 따위의 물건으로 바뀐다. 그런데 바뀐 물건이 파손되면 사람으로 돌아오더라도 다치거나 생명을 잃을 수 있다. 돌멩이가 가장 안전해 보인다. 변신이 전국으로 확산된다. 국가재난상황으로 치닫지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급기야 폭탄으로 바뀌는 사례가 발생한다. 터진다. 그리고 집단으로 변신한다. 청소년들이.

연극 '엑소더스'는 절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설명이 없다. 변신의 이유를 말하지 않고, 진단도 없다. 절멸을 말하지만 그 원인은 안중에도 없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마치 다 알면서 뭘 물어보냐는 것처럼, 진정 문제 해결을 바라기는 하냐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것은 실태를 진단하고 원인을 파악할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는 선언이다. 절멸 앞에서 우리 사회에 보내는 최후의 신호가 아니라면 이 연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당신들은 지구를 위협하는 진짜 문제들보다 나와 시위에 가세하는 청소년들을 더 무서워하는군요." 지난 7월 프랑스 의회에서 그레타 툰베리가 한 말이다. 그는 2003년 이 별에 왔다. 이 별에 온 지 16년이 된 그가 보기에 지금 상태라면 지구사회는 지속불가능하다.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 캠페인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다. 그와 함께 세계의 청소년이 '미래를 위한 금요일' 운동으로 기후재앙의 절박함을 외치고 있지만 지구사회가 바뀌고 있다는 소식은 여전히 잘 들리지 않는다. 그 목소리가 작아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외침을 듣고도 듣지 못하는 데 있다. 현재의 삶의 방식을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실천으로 전환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청소년의 변신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자 비상토론회가 열린다. 각계각층을 대표해서 토론자가 모였다. 저마다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토론회는 토론은 토론일 뿐이라는 사실만을 증명하고 끝난다. 이 장면의 압권은 토론회를 마칠 무렵에 펼쳐진다. 토론회에 참석한 각계각층의 대표자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이 따로 있다. 바로 자신들의 연금이다. 청소년이 모두 사라진 후 발생할 연금 고갈 사태를 걱정하고 있다. 진정 비상한 토론회가 아닐 수 없다.

변신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곰이나 백조에서부터 벌레까지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변신 이야기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것을 낯설게 만들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지금의 삶의 방식을 넘어서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머나먼 타지에 갔다가 돌아오면 자신이 살던 곳이 낯설게 보이는 그러한 여행에 가깝다. 그렇지 않다면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변신 이야기에는 우리가 한때 익숙하고 자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낯선 시선으로 돌아보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 힘으로 지금의 세계에 드리운 그늘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연극 '엑소더스'가 지금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탈출의 이야기를 하는 까닭도 다르지 않다.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