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던 일 이루면 여한 없다던 공자
윤봉길, 문자 그대로 목숨 바쳐 거사
논어 어떻게 읽었는지 알 수 있어
선서문 말미 적힌 국호 '대한민국'
그가 지키려 했던 나라 명명백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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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논어를 읽다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대목에 이르러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긴 적이 있다.

매사에 중용을 따르는 공자가 어찌하여 '죽어도 좋다'는 과격한 말을 했을까? 설마하니 도를 듣고 나면 죽어야 한단 말인가? 목숨 바칠 만한 도가 과연 있기나 한 걸까? 공자는 나이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고 하니 그때 도를 들었다고 할 법한데 왜 죽지 않고 73세(혹은 74세)까지 살았을까?

별의별 의심이 꼬리를 물어 생각이 길어졌지만 이 말을 꼭 죽겠다는 결연한 각오가 아니라 간절히 바라던 일을 이루고 나면 더 이상 여한이 없겠다는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컨대 나도 한때는 십삼경을 모두 풀이하고 나면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그때도 정말 죽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기억의 한 구석으로 밀려났던 논어의 이 대목이 다시 염두에 놓인 건, 언젠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한번 집을 나서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음)'이라고 적힌 글씨를 보았을 때였다. 처음에는 어떤 허풍쟁이가 저런 허튼소리를 했는가 싶어 아연했다가 종내 그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글을 남긴 사람이 매헌 윤봉길이었고 그의 삶이 과연 저 말과 부합했기 때문이다. '조문도 석사가의'를 문자 그대로 목숨을 바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죽기를 기약하지 않고는 도를 들을 수 없는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저녁에 죽고자 함은 아침에 도를 듣기 위해서구나. 이 사람은 논어를 제대로 읽었구나. 논어에 이르길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삶을 구하기 위해 인(仁)을 해치는 일은 없고 자신을 죽여 인을 이룬다 하지 않았던가.

그는 1930년 3월 6일 고향 예산을 떠나 중국 상해로 망명했는데 2년 뒤 일제가 상해를 침략하자 고향의 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집을 떠날 때 각오한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의 결심을 이번에 실행한다. 너에게 부탁하니 부모님을 공양하라. 효가 나라사랑의 근본이다."

마침내 1932년 4월 29일, 일제가 전승 축하행사를 열고 있던 상해 홍구공원에 간 그는 일본군 장교들이 모여 있던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했다. 이 의거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는 폭사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절단되는 등 다수의 일인들이 죽거나 다쳤다.

거사 후 체포된 윤봉길은 한 달이 채 안 된 5월 25일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일제는 그의 시신을 공동묘지로 가는 길목에 매장하여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함으로써 끝까지 저열한 보복으로 그를 모독했다. 그의 시신은 광복 이후 고국으로 옮겨져 현재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짧은 삶을 살았던 윤봉길은 논어를 풀이하거나 번역한 적이 없지만 그의 삶을 보면 그가 논어를 어떻게 읽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논어를 읽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어떤 자는 논어를 읽고 나라를 팔아먹는다. 논어는 읽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것이다.

p.s. 다음은 윤 의사가 거사에 나서기 전 작성한 선서문의 내용이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말미에 분명히 적혀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에서 그가 지키려 했던 나라가 대한민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이전에는 대한민국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눈을 씻고 살펴야 할 것이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