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신궁은 천조대신이 2천700년 전 이곳 바닷가 마을 이세마을에 터를 잡고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곳이라 신궁을 건립한 것이다. 일본국민들이 신앙의 영적 중심지로 숭상하는 곳이다. 자료를 보면 이세신궁에 들어서면 천고의 세월 맑게 흐른다는 오십령천이 나온다. 전나무로 조성된 저치다리를 건너면 신궁의 웅장한 전나무와 삼나무 숲길이 나오고 양쪽 참배길에는 국화꽃 문양의 황실 문장기와 등롱, 꽃들이 조성돼있다. 참배길 따라 쭉 들어서면 좌측에 천조대신의 신전이 있는 내궁이 나온다. 좀 더 들어가 화재다리를 건너면 우측에 외궁이 나온다.
외궁에는 풍수대신의 신전이 있는 곳이다. 물과 바람을 다스리는 신이라고 한다. 아키히토 전 일왕도 신궁 입구에서부터는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신궁에서 제례 때 사용하는 음식 재료 중 물과 소금은 존귀하게 여겨 신궁 자체에서 자급하고 있다. 봉헌되는 많은 음식 중에서도 물과 소금은 꼭 봉헌되는 음식재료다. 물과 소금은 신궁에 있는 우물과 신궁 근처 이견포에 있는 신궁전용 염전에서 채취해 사용하고 있다. 제례음식은 기화옥전 불씨가 모여있다 하여 잠화라고도 부르는 건물에서 준비한다.
퇴임의식 전 아키히토 일왕은 재관이라는 곳에서 재계의식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계불 또는 계사라 하여 국가적 행사와 의례 등이 있을 때 재계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법령도 있다. 일본 고대부터 전래하는 계불의 풍습을 제42대 문무천황(697-707)이 제정한 것이다. 제122대 명치천황은 1868년 계불사상을 더 활성화시키려고 제례와 정치는 일체화하라는 칙령도 발표했다.
오는 22일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을 앞두고 아키히토 전 일왕의 근황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유가 있다. 아키히토 전 일왕은 한국에 대해 친근한 관심과 모습을 우리에게 퇴임 전까지 보여주었다. 2001년 아키히토 전 일왕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내용을 발표했다. 한국과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도 말했다. 제50대 환무천황(781~806)의 생모가 백제 무녕왕(501~522)의 자손이어서 한국과 인연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환무천황의 생모는 화(和)씨였다. 제49대 광인천황(770~781)이 황태자 시절에 일본으로 건너가 혼인한 것이다. 2005년 사이판 방문 때 예정에 없던 조선인 위령비를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문무천황이 703년 고구려 왕세자 약광(若光)에게 왕의 칭호를 하사하여 약광왕으로 불렸던 약광왕(별칭: 백발명신)은 제44대 원정천황 (여성 715~723)이 관동지역 7개 마을에 흩어져 생활하던 고구려인들을 위해 무장이란 마을에 고구려 마을을 조성하자 약광왕을 비롯 고구려인 모두가 이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751년 숨진 약광왕은 고려산 성천원에 묘가 있으며 근처에 약광왕을 기리는 1552년에 건립된 고려신사를 2017년 9월에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일왕으로서 한국에 대한 우호적 모습을 보여줘 아키히토 전 일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 토종의 편협적 성격을 보이고 있는 일본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일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황실가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기간이 1239년이 되었다. 재임 기간 한국방문을 원했던 아키히토 전 일왕의 염원이 이뤄지기 바란다.
/이강동 인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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