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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기 미풍에도 얇은 금편(金片)들 떨어져 내려/···//알몸인 이 몸에 그 정결한 금편들 닿으면/ 녹아서 이내 부드럽게 금칠하리/ 마침내 이 몸이 그냥 그대로 생불(生佛)될 때까지." 시인 박희진은 '방학동 은행나무'의 황금색 낙엽을 맞으며 성불을 꿈꿨다지만, 보통 사람들도 샛노란 잎들로 단장한 은행나무를 보면 가을을 직감하고 생각이 깊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 감성을 파고드는 신령스러운 기운과 아름다운 자태 뿐만 아니라, 은행나무의 실용성도 독보적이다. 잎은 혈액순환 개선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 은행잎의 약성이 좋아 한때 독일 제약회사들이 싹쓸이해 갔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가 은행이라 부르는 종자는 진해·거담 작용을 하는데, 포장마차 술안주에서부터 고급 한식 재료에 오르는 등 빈부 격차 없이 즐겨 온 식재료이기도 하다. 재질이 물러서 다루기 쉽고 무늬가 아름다운데도 변형이 없는 은행나무는 고급가구와 바둑판의 최상급 목재로 손꼽힌다.

신은 다 주지 않는다더니, 은행나무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종자를 감싼 과육이 터질 때 번지는 엄청난 악취가 그것이다. 냄새가 너무 고약해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은행 과육으로 도배된 길을 걷는 일 자체가 고역이다. 은행 냄새는 과육안에 있는 은행산, 빌로볼 성분 때문인데 과육 속 씨앗을 지키기 위한 은행나무의 생존 전략이다. 은행나무 입장에서는 모든 걸 다 주고도, 종을 지키려는 최소한 자위권 때문에 수난을 당하니 억울할 만하다.

가을이면 은행 악취 대책을 요구하는 민원으로 지방자치단체들이 몸살을 앓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대책은 과육이 열리는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하거나 아예 가로수 수종을 교체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돈이 들고 시간이 걸린다. 최근엔 이산화탄소 흡수율이 높은 은행나무의 대기오염 방지 효과를 옹호하며 수종 교체를 반대하는 역민원도 있다니, 자치단체들은 이래저래 골치 아프게 됐다.

광장과 거리를 묵묵히 지켜 온 은행나무다. 요근래 대한민국 광장과 거리는 비난과 욕설, 궤변과 망언을 토해내는 수십만 인파들의 구취(口臭)에 취해 비틀거린다. 광장과 거리의 사람들이 은행 냄새를 탓하기 보다, 은행나무의 유일무이한 품격을 주목했으면 한다. 지구상에 오직 한 종 뿐인 은행나무처럼, 세상에서 유일한 한민족 아닌가. 이렇게 척지고 분열되면 안된다. 올 가을, 은행나무 단풍잎 맞으며 성불까지는 아니어도 '우리'를 생각해 봄직하다.

/윤인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