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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단 한 번도 국가를 가져보지 못한 세계 최대의 민족'. 인구 4천만명의 유랑 민족 쿠르드 족 앞에 늘 따라다니는 말이다. '쿠르드족에게는 친구는 없고 산만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악지역에 거주한다. 터키 남동부와 이란 북서부, 이라크 북동부와 시리아 북동부에 걸친 넓은 산악 지대에 살면서 중동 각국의 핍박을 받으면서 이리저리 쫓겨 다녀야 했던 슬픈 종족 쿠르드. 1916년 영국과 프랑스 간 '사이크스 피코 협정'으로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등 인접 4개국으로 강제 분할됐다. 이때부터 쿠르드족이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이들 국가로부터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중동 각국의 먹잇감 신세였던 그들의 희망은 아이러니하게 IS(이슬람 국가)였다. IS가 세를 넓히며 중동의 골칫거리로 등장하자 쿠르드는 2014년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아 IS와 크고 작은 전투로 4만여 명의 쿠르드 민병대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쿠르드족은 미국을 동맹으로 여겼고, 언젠가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쿠르디스탄'에서의 건국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미군이 시리아에서 전격적으로 철수함으로써 쿠르드족의 이런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동맹과의 신의를 버린 트럼프 대통령의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미국의 배신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72년 친미였던 이란과 친소였던 이라크가 국경 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이라크 내 쿠르드족을 이용해 이란을 견제했다. 이라크 쿠르드 족은 이라크와 3년 동안 전쟁을 치렀지만,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미국은 언제 그랬냐며 쿠르드족을 외면했다. 반면 쿠르드족이 또다시 이란 편에 설 것을 우려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1988년 이들이 모여 사는 할라브자 마을을 화학무기로 공격해 5천여명이 사망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전 세계의 공분을 샀다.

미군이 철수하자 터키는 기다렸다는 듯 시리아 쿠르드족에 대한 폭격을 가하고 있다. 이제 쿠르드족은 맹수가 우글거리는 곳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어린 양 처지가 됐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기까지는 하나로 뭉치지 못한 쿠르드족 내부 탓도 크다. 쿠르드족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나 다름없다. 터키계, 이란계, 이라크계 등으로 서로 나뉘어 늘 대립했고, 강대국과 주변국들은 분열을 조장하면서 이를 이용했다. 이런 슬픈 쿠르드족의 모습이 열강 사이에 끼어 헤매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