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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은 최고의 권위 만큼이나 논쟁적이다. 수상자와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는 수상 분야의 성취를 세계적으로 공인받는 기쁨을 누린다. 그런 만큼 선정 사유에 사소한 하자만 발생해도 국제적인 시빗거리가 되기 일쑤다.

14일 경제학상 수상자 발표로 2019년 노벨상 수상자 전원이 확정됐다. 하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시비가 걸렸다. 문학상 수상자인 오스트리아 희곡 작가 페터 한트케의 전범 옹호 전력이 도마에 올랐다. 한트케는 발칸의 도살자로 악명 높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 추종자로 유명하다.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앞세워 코소보 등지에서 인종청소를 주도했다. 한트케는 그가 죽자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기도 했다.

한트케는 자신의 전력 때문에 노벨 문학상 수상이 어려울 것으로 짐작했는지 2014년엔 "문학의 잘못된 성역화"라는 문학적 레토릭으로 노벨상 폐지를 주장했다. 이 정도면 "자본주의가 준 상을 받을 수 없다"며 수상을 거부한 장 폴 사르트르를 따라 할 만도 했다. 그런데 한트케는 "작품이 이제 빛을 보는 것 같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했다"며 "스웨덴 한림원의 결정은 매우 용기 있는 것"이라고 반색했다니, 작품은 몰라도 인품과 권위는 노벨상감에 못미친다.

이처럼 논쟁적인 노벨상이지만, 한국은 해마다 노벨상 증후군으로 집단적 열등감과 열패감에 시달린다. 특히 역사적 민족적 경쟁자인 일본의 화려한 수상기록이 이를 더욱 부추긴다. 올해도 일본은 요시노 아키라가 노벨화학상 수상자가 됐다. 25번 째 수상자다. 우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이 유일하니, 노벨상 수상의 격차가 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노벨상을 향한 집착 만큼 노벨상 수상을 위한 기반을 착실히 다져왔는지 돌아볼 때가 됐다. 기반이 없으니 대표선수를 밀다가 낭패를 본다. 여당이 노벨상 추진단을 만들기까지 한 황우석씨는 연구부정으로 낙마했다. 문학상 대표선수로 노벨상 시즌마다 자택을 찾은 취재진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고은 시인은 '미투 운동'에 걸려 문학상 만년 후보에서 해방(?)됐다.

고교 재학생이 의학논문 제1저자가 되는 나라의 학문 토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한다면, 오히려 기적에 가깝다. 기적을 바랄게 아니라 인문, 사회, 과학 분야 종사자들에게 축적의 시간을 허용하는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윤인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