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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연합뉴스

홀로간 도쿄서 알바·자취
'성실' 눈 여겨본 하나미쓰
'커팅오일 공장' 사업 제의
미군기 잇단폭격에 문닫아
종전후 재기 마음의 빚갚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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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는 19세 때인 1941년에 아내를 고향에 두고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돈도 벌고 못다 한 공부를 위해서였다. 부친은 그의 일본행을 반대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먼 친척으로부터 50엔, 사촌형 신병호에게 30엔을 빌리는 등 도일자금 83엔을 마련했다. 83엔은 당시 면서기의 2개월 치 봉급에 해당했다.

도쿄에 도착한 신격호는 미리 연락해둔 그곳의 고향 친구들을 찾았다. 그들은 스기나미구(衫竝區)에 있는 연립주택의 다다미 8장짜리 방 하나를 빌려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 83엔 품고서 일본 유학

신격호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거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음날부터 우유 배달을 하는 한편 와세다(早稻田)중학교 야간부에 적을 두었다. 당시 일본의 사학은 식민지 출신 유학생에 개방적이었다.

이후부터 주경야독의 고학생 생활이 개시됐다. 친구의 하숙방에서 6개월쯤 얹혀살다 한 평 반짜리 방 하나를 얻어 독립했다. 틈날 때마다 간다 거리의 헌책방을 누비며 마음에 드는 책을 사서 독파했다. 

 

당시 격호 청년의 고학생 시절을 지켜본 풍산그룹의 류찬우 회장은 "그 시절 신 회장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와세다공업고등학교(현 와세다대학 이학부) 야간부 화공과를 선택했다. 

 

"전쟁준비에 부산할 때라 실업계 학교에 지망해야 징병을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공과를 지망하게 됐는데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3류 문사(文士)쯤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련은 없다."(이종재, '재벌이력서', 171쪽)

>> 전당포주인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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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막판으로 치닫던 1944년에 그에게 사업기회가 주어졌다. 

 

고학하며 어렵게 생활하는 신격호를 평소에 눈여겨봤던 전당포 및 고물상 주인인 60대의 하나미쓰가 어느 날 찾아온 것이다. 

 

신격호는 한때 하나미쓰가 운영하던 고물상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인연으로 하나미쓰는 신격호를 신뢰했다.

하나미쓰가 신격호의 근면함에 후한 점수를 준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참 부지런하다고 자찬하는 사람이거든. 살면서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을 둘 봤다. 관직에서는 반기문, 민간에선 신격호이다. 롯데에서 20년간 신 회장이 일하는 걸 보니 새벽이든 밤이든 어찌나 부지런한지. 저러니까 혼자서 큰 기업을 일궜구나 싶더라고."(노신영 전 국무총리, '동아일보' 2016.1.4.)

하나미쓰는 신격호에게 군수용 커팅오일 제조공장을 차릴 것을 제안했다. 커팅오일은 기계를 연마하고 자르는 데 사용하는 선반용 윤활유였다. 

 

소요 자금 6만엔은 하나미쓰가 전액 출자하겠다고 제의했다. 당시 일류 회사원의 한 달 월급이 80엔에서 100엔 정도로 6만엔은 거액이었다.

신격호는 하나미쓰의 제의를 받아들여 도쿄 오오모리에 공장을 임차해서 사업에 착수했으나 가동도 하기 전에 미군 B29기의 포격을 받아 파괴되고 말았다. 

 

하치오지 부근에 새로 공장을 마련해 생산에 착수, 1년여 운영하는 동안 사업은 잘됐다. 그러나 이 공장 또한 미군기의 포격으로 문을 닫았다. 사업자금 6만엔은 고스란히 신격호의 빚으로 남았다.

패전 후인 1946년 5월 도쿄 스기나미구 오구보4의 82에 있는 군수공장 기숙사 자리에 숙소 겸 새 사업장을 차렸다. 전쟁 중 공습으로 절반 정도 파괴된 형편없는 벽돌집이었다. 

 

'히까리(光) 특수연구소'란 간판을 내걸고 화장품사업에 착수했다. 비누와 포마드 등 유지제품을 생산했다. 오랜 기간 전쟁으로 생필품이 매우 부족해 신격호가 생산한 제품은 출하되자마자 순식간에 소화됐다.

 

납품과 수금을 위해 하루 평균 200곳의 납품처를 돌아다녀야 했지만 공장 운영 1년 반 만에 차입금 6만 엔을 전부 상환함은 물론 은인 하나미쓰 노인에게 이자로 집을 한 채 사주었다.

"신 회장은 이때 사업의 묘미를 터득했다고 한다. 

 

즉 시의적절한 상품개발, 수요예측,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추진력이 사업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 등이었다."('매일경제신문', 1992년 4월 6일 '人物탐구')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