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혹한 역사·생애 작품마다 녹여내
해방후 고향·나라·한글사랑 더깊어
이승만·박정희정부 가차없는 비판
제언 마다않던 민족·민주주의자였다

외솔 선생은 국어와 한글을 한 축에, 민족 독립과 문화 발전을 한 축에 놓고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은 잘 알면서도, 선생이 시조 백여 편을 남긴 시인이었다는 점은 전혀 모르는 듯하다. 선생의 시조는 외솔회에서 펴낸 전집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쓴 시조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견고한 수납, 민족의식의 발견과 깨침, 형무소에서의 옥고를 통한 스스로의 정체성 확인 같은 주제로 쉼 없이 흘러갔다. 이 땅의 엄혹한 역사와 궤를 함께한 선생의 생애가 작품 편편마다 실감 있게 녹아 있다. 해방 후에 쓴 시조에는 고향과 나라와 한글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목소리가 깊이 있게 담겨 있다. 그 목소리에는 선생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origin)에 대한 열망이 가라앉아 있는데, 선생은 시조를 통해 자신의 학자적 정체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근원적으로 표상한 것이다. 대체로 시인들은 삶의 길목마다 그 생성적 항체를 얻기 위해 자신의 기원을 상상하곤 한다. 외솔 선생은 자신의 기원을 확인해가는 과정을 '고향'과 '나라'와 '한글'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통해 지속적으로 수행해간 것이다.
외솔 선생이 우리 지성사에 남긴 문양은 다양하다. 선생은 어려서 배운 한문과 일신학교 때부터 익힌 근대적 학문의 결속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조선어강습원에 다니면서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사사한 것이 민족의식 발로의 결정적 계기가 되어주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와 교토대학 문학부에서 더욱 넓고 깊은 근대적 학문을 배웠는데, 이때 선생은 전통과 근대 가운데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 맞춤복을 마련하게 된다. 귀국해서는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본격적 한글 연구와 조선어학회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에 갇혀 해방이 되어서야 출옥할 수 있었다. 해방 후에는 문교부 편수국장, 연세대 교수, 한글학회 이사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일생 국어학 연구와 국어정책 수립에 정성을 다했다. 그런 선생에게 만만찮은 시조 창작의 열정과 그 결실이 있었다는 점이 최근 각별하게 연구되어 그 결과로 외솔시조문학상이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선생의 다양한 문화적 실천을 알맞게 조명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일제에는 물론, 이승만, 박정희 정부에도 가차없는 비판과 제언을 마다하지 않은 민족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였다. 이러한 저항의 존재증명에 '말'과 '글'의 가치를 부가한 것은 두고두고 선생의 독자적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내년이면 선생 50주기를 맞는데, 새삼 선생이 평생 정성을 다한 겨레의 문화적 자산으로서 '한글'과 '시조'를 양쪽에서 귀납하고 해석하는 일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말본', '조선민족 갱생의 도',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의 저자가 시조시인으로 또한 각인되어가는 순간을 마음 깊이 기다려본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