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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에게는 또하나의 사업이 주어졌는데 바로 추잉껌 제조사업이었다. 사진은 롯데의 대표적인 추잉껌. /롯데 제공

1948년 자본금 100만엔으로
日정착 8년만에 '롯데' 설립
마케팅 능력 탁월 '급성장'
품질로 승부 연구에 공들여
30억엔 시장 경쟁서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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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까리연구소가 성업 중일 때 신격호에게 또 하나의 사업기회가 주어졌는데 이는 추잉껌 제조사업이었다.

 

일본에는 1945년 미군의 진주와 함께 초콜릿, 통조림, 담배, 추잉껌 등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1946년부터 풍선껌이 대유행했다. 

 

어느날 풍선껌을 만드는 친구가 찾아와 신격호에게 풍선껌 제조를 권했다.

>> '다크호스'로 부상

당시 일본에서 풍선껌은 비행기 창유리를 녹인 초산비닐수지에 송진과 도료(塗料)인 가소제를 섞은 것을 가마솥에 넣어 녹인 후 여기에 사카린과 바나나 냄새 비슷한 향료 등을 추가해서 만들었다. 

 

원료는 통제를 받지 않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었다. 가마솥과 요리용 칼만 있으면 껌의 제조가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는 350~400개의 풍선껌 제조업체들이 난립했다. 

 

껌은 가격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순이익이 판매가격의 50% 정도여서 사업성이 충분했다.

24세 청년사업가 신격호는 1947년 4월부터 껌 제조에 착수했다. 완벽주의자인 그는 원료조제의 정확성을 위해 약제사 1명을 고용하고 수동식 기계를 설치했다. 

 

가 만든 2엔짜리 풍선껌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좋았다. 시제품이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자 자신을 얻은 신격호는 풍선껌을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한편 1948년 6월 28일에 종업원 10명에 자본금 100만엔의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사업목적으로 청량음료, 시럽류, 냉과, 냉동식품, 낙농, 화장품 및 치약, 구강청량제, 화공 약품, 의약품, 합성수지 제조가공 등이었다. 

 

'롯데'라는 상호는 신격호가 감명 깊게 읽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온 것이다. 

 

'롯데'는 청년 신격호가 사모하던 상상 속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신격호가 낯선 일본 땅에 발을 디딘 지 8년째 되는 해이다.


초기 추잉껌 제조법은 유치했다. 신일본질소(주)에서 제조한 질소비닐을 껌의 베이스로 사용했는데 질소비닐에는 초산에틸렌 50%가 함유됐다. 설탕은 통제물자여서 대체품으로 사카린이나 사탕 대용물질인 둘찐을 사용했다.

>> 설탕, 통제에서 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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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원 10명으로 출발한 (주)롯데는 신격호의 탁월한 마케팅 능력에 힘입어 급성장했다. 1948년 당시 일본에서는 '하리스' 추잉껌이 최고인기였다. 

 

신격호는 후발주자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삼각형 모양의 풍선껌에 대나무 파이프를 붙였다. 

 

껌을 씹은 후 대나무 파이프 끝에 달아 입으로 불면 비눗방울처럼 부풀려지는 것이다. 

 

마땅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이어서 공전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롯데는 어느새 군소 메이커를 내치고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1952년에는 제과업계의 숙원이 이뤄졌다. 설탕이 통제에서 풀린 것이다. 껌의 이상적인 품질은 껌 베이스 40%, 설탕 60%로 여기에 향료를 섞어 메이커별로 독특한 맛을 내는 것이다. 

 

신격호는 품질로 승부하기로 하고 연구에 공을 들였다.

 

이 무렵 일본의 추잉껌 시장은 30억엔이었는데 경쟁에서 살아남은 업체는 도쿄의 롯데와 킹토리스 등 5사와 나고야의 코엔, 일본푸드 등 5사, 그리고 오사카의 하리스, 릴리, 세이코 등 3사 등 대략 13개 업체가 살아남았는데 오사카의 하리스가 절대 강자였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