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 서점 점점 줄고 복사집만 우후죽순
정부, 대중교양서 변경 학술도서지원 축소
지식 다양성 압살하는데 놀아나 실망이다
1843년 미국 뉴욕에서 처음 발견된 감자역병이 대서양을 넘어 1845년에는 유럽의 농촌을 휩쓸었다. 1845년 9월 6일자 아일랜드 신문들은 감자역병이 상륙했다고 대서특필했는데 불과 1년 만에 아일랜드 농촌이 초토화되었다. 1800년 초에 아메리카에서 수입된 럼퍼감자(lumper potato)는 완전식품으로서 좁은 땅에서도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행운의 선물이었다. 아일랜드는 기후가 춥고 습해서 감자 말고는 잘 자라는 작물도 별로 없었다. 전국의 농촌이 감자 단작(單作)지대로 변한 상황에서 급작스런 역병에 아일랜드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아일랜드인이 스스로 식량 다양성을 포기한 대가였다.
모 탐사전문 기자가 작년 초에 책을 출판했다며 필자에게 한 권을 보냈다. 한국전쟁 무렵 호남과 제주도의 양민학살 현장을 몇 년간 손수 발품을 팔며 어렵게 모은 자료들을 책으로 만든 것으로 사료(史料)적 가치가 충분했다. 당시 그는 경상도 지역 조사와 함께 제2권을 집필 중이었지만 끝내 작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출판사들이 돈벌이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친 것이다.
서울 관악구 낙성대 부근의 G연구소는 근래 들어 연구비지원 사업을 중단했다. 명망이 있는 노(老) 교수님이 사재(私財)를 털어 설립한 곳으로 매년 기초학문 신진들을 선발해서 소정의 장려금을 지급하고 연구 성과를 책으로 출간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갈수록 출판환경이 척박해지면서 학술출판사들조차 매출이 불투명한 서적간행을 외면하는 바람에 연구물 출판이 거의 불가능해진 것이다.
대학교수들은 학기 초만 되면 교재선정에 불편을 겪는다. 한글로 저술된 전공서적이 갈수록 줄어든 때문인데 대학교재 출판사들이 부지기수로 문을 닫았다. 교수들을 논문기계(?)로 몰아가는 교육당국의 무지(無知)가 결정적이다. 웬만한 볼륨의 학술서적 한 권을 발간하는데 원고작성에만 최하 1년여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SCI(Science Citation Index)급 논문 한편보다 낮게 평가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불법복사도 한몫 거들어 출판사 영업사원들은 절망이다.
"대학가에 서점이 많이 줄었습니다. 구내서점이랑 학교 밖 K대 서점 말고는 없어요. 그런데 그 옆에 복사집만 70곳이 넘습니다. 복사집이 강의계획서를 보고 교재를 구입해서 스캔한 파일을 갖고 있는 거죠. 학생이 와서 교재를 달라고 하면 바로 파일을 복사해서 줍니다."
정부는 한술 더 뜬다. 학술출판사들에게 가뭄의 단비 같았던 '우수학술도서 선정사업'이 2014년에 세속적 기준의 '세종도서' 선정사업으로 바뀐 것이다. '우수학술도서 선정사업'은 대중성이 없어 출판이 어려운 기초학문 서적들이 햇빛을 볼 수 있도록 문화체육관광부가 해마다 30여억원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세종도서 선정사업의 경우 예산액은 이전과 동일하나 '국민 공감'을 기준으로 선정도서수를 대폭 확대하고 여기에 우수학술도서까지 끼워 넣었다. 대중교양서를 위한 정책으로 변질되면서 학술도서 지원 사업이 현격히 축소된 것이다.
지식축적 정도와 경제발전 간에 상관관계가 매우 높다. 미국, 독일, 일본 등이 인공지능,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의 4차 산업혁명에 올인하는 이유이다. 선진국 정부들은 돈벌이 안 되는 양서(良書) 종류를 늘리는데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국가 경쟁력의 핵심인 지식재산 축적의 요체는 도서 가지 수를 늘리는 것이다. 지식의 다양성을 압살하는 출판자본주에 놀아나는 정부에 실망이다.
/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