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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초라했다. 1969년 허허벌판이던 수원시 매탄동에 '삼성전자공업(주)'가 문을 열었다. 처음엔 일본 산요전기와 합작해 흑백 TV와 선풍기를 생산했다. 하지만 금성사(현 LG전자)에 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적자가 지속됐다. 1974년엔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이 한국 반도체를 인수했다. 회사 내부에서는 말이 많았다. TV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첨단으로 가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거였다. 1983년 2월 73세의 호암이 전 재산을 내걸고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도쿄 선언'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외 반응이 차가웠다.

인텔은 호암을 가리켜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호암의 선택이 '신의 한 수'였음을 증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83년 64K D램을 처음 개발했다. 당시 인텔과의 기술격차는 4년 반이었다. 그 격차가 1989년에 없어지고, 1992년 64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이 분야의 1위로 올라섰다. 지금은 후발기업도 범접할 수 없을 '초격차(超格差)'로 벌려놓았다.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이제 삼성전자는 시가 총액 300조원, 브랜드 가치 611억달러로 애플, 구글 등에 이어 세계 6위의 기업이 되어 한국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다.

삼성전자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온갖 수모를 참아가며 선진기술을 배우고, 여기에 창의성을 가미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일궈 낸 연구진, 좀 더 좋은 제품을 더욱 싸게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땀 흘린 근로자들의 공이 크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업이 적자를 내고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며 기업의 책임을 강조하며 인재중시와 사업보국을 기치로 '한국판 산업혁명'을 일으킨 호암 이병철 회장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1995년 품질 결함이 있던 애니콜 휴대전화를 불태우며 삼성 스마트 폰 신화를 만든 이건희 회장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이재용 부회장 체제로 창립 50주년을 맞은 오늘, 삼성전자를 둘러싼 대내외 환경은 그리 녹록지 않다. 이 부회장은 3년간 재판을 받고 있고, 중국은 삼성전자를 잡기 위해 '반도체 굴기'를 선언했다. 이 부회장의 어깨도 무거워졌다. 위기극복 리더십과 함께 바이오와 전자장치산업 같은 신산업에서 미래 먹거리의 성과를 내는 것도 이 부회장의 몫이다. 대내외 어려움을 극복하고 삼성전자가 초일류기업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