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라는건 '민주 vs 반민주' 아닌
정치 민주화에 '경제 민주화' 탑재
민생정책에서 우위를 증명하는 것
'극악 현실' 바꾸려는 사명감 있다면
이전 정치인들과 다름을 보여줘야

월요논단 홍기돈2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얼마 전부터 일명 86세대가 비판의 표적으로 떠올랐다. 나는 그네들이 386세대니, 486세대니 요란하게 스스로를 치장해 나갈 즈음부터 냉소를 보내고 있었다. 생물학적 연령으로 따지건대, 60년대 태어난 이들이 80년대에 대학 다녔던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 앞에 붙이는 30대, 40대라는 숫자도 그저 젊다는 사실의 강조일 뿐, 생물학적 연령의 조합에 불과한 의미 없는 명명일 따름이다.

물론 명명이 작위적이라는 이유로 인해 냉소해 왔던 것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에 우리 사회는 민주화 측면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대학생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겠으나, 노동계·종교계의 활동도 적극적이었으며, 시민들의 호응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30대가 된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굳이 자신들을 386세대라 규정했던 까닭은 민주화 성과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네들은 어떠한 시대정신도 세대 규정 속에 담아내지 못했다. 예컨대 긴급조치와 맞섰던 정신을 담아낸 긴조세대라는 명명과 비교해보라. 86세대란 명명의 경박성은 이로써 명확해진다.

70년대에 태어난 나는 90년대 상반기에 대학을 다녔다. 그때 술자리에서 많이 불렸던 노래 가운데 하나가 김호철 선생의 '잘린 손가락'이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 잔 마시는 밤, 덜컥덜컥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잘린 손가락 묻고 오는 밤, 시린 눈물 흘리던 밤, 피 묻은 작업복에 지나간 내 청춘 이리도 서럽구나." 작업하다가 손가락이 잘렸는데 그저 소주잔으로 아픔을 달래야 하는 형편이라니.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내심 다짐하였다. 이러한 현실만큼은 바뀌어야 한다, 바꿔야 한다.

하지만 삼십여 년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노동현장은 변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11일 충남 태안의 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씨가 컨베이어 롤러에 빨려 들어가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올해 2월 20일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는 이모씨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졌다. 당진제철소의 경우 2007년부터 2019년 2월까지 사고로 숨진 노동자가 30여 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2017년 11월 9일에는 음료 공장으로 현장실습 나간 고등학생 이민호군이 기계에 끼여 숨진 일도 있었다. 충남 공주의 34살 비정규직 집배원 이은장씨가 과로로 돌연사하는 등 올해에만 집배원 노동자 아홉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비정규직의 죽음을 일일이 기록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는 지난 13일 전태일 동상 앞에서 다음과 같이 현실을 지적하였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하던 때보다 지금 현장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간다. 구조적으로 비정규직을 만들어놓고 부품 취급하며 갈아 끼운다." 그리고는 비판을 이어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2년까지 산재 사망사고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현장에선 특별히 변한 것이 없다. 책임자 처벌도, 김용균 특별조사위원회가 내놓은 권고안(22개)도 이뤄지지 않았다. 벌써 이러면 앞으로 어떻게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이 행렬을 이루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반민주 세력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이다. 나경원이 조국보다 기득권을 훨씬 더 많이 누렸다고 아무리 강변해 보았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싹틀 리 만무하다. 지금 86세대에게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입각한 전면적인 진영 대결이 아니라, 정치 민주화에 경제 민주화를 탑재함으로써 민생 정책에서의 우위를 증명하는 작업이다. 극악한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사명감이 권력욕으로 드러났을 따름이라는 알리바이가 확보될 때, 86세대 정치인들 또한 이전 정치인들과 변별되는 존재 의미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