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친절, 친절, 친절!' 외친후
억지로라도 환한 미소 짓기로 결심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울감 횟수가
점점 줄어드는 '작은 기적'을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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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늘 다니던 체육관에 회원 등록을 다시 하면서 생긴 일입니다. 늘 친절하던 직원이 그날따라 너무 신경질적으로 업무 처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사적으로 화가 났습니다. '내 돈 내고 이용하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더욱이 그 사람의 월급은 고객으로부터 나오는 것일 텐데 말입니다. 다행히 잘 참고 등록을 마쳤지만, 마음이 영 불편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다시 서비스 데스크에서 그분을 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처럼 또 친절하게 응대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커피를 한 잔 사들고 가서는 당시 전후 과정을 설명하고 그땐 왜 그랬는지 넌지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기억조차 못 하고 있었습니다. 되레 "제가 그랬었나요?"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수차례에 걸쳐 사과를 거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두고, 적어도 업무에 임할 때만큼은 친절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라고 자부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마음속 기분이 표출되게 마련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 자체가 밖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족 간에 다툼이 있거나, 병에 걸렸거나,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면 말하지 않아도 그 상황이 밖으로 표현됩니다. 반대로 승진이나 시험 합격 등 기쁜 상황도 밖으로 드러나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성당의 신부는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위로와 기도를 구하고자 찾아오는 분도 있고, 성당 업무 처리를 위해 대면하는 분도 있습니다. 보다 친절하게 그 모든 사람을 만나고 싶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내가 친절했는지 불친절했는지는 만남이 끝난 후에 바로 압니다. 조금이라도 불친절했다면 상대방의 표정에 그대로 나타나고, 체증이 느껴질 만큼 마음이 답답합니다.
아들의 암 발병으로 반죽음이 돼 찾아온 어머니를 대하면서 그분의 아픔에 깊이 동참해야 하는데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건조한 답변을 드리고 면담을 마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신자는 성당의 발전을 위해 제도를 개선해달라고 건의합니다. 그에 대해 별 설명도 없이 "안돼요"라고 퉁명스럽게 답변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가끔 있는 일입니다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요.
생각해 보면 제가 가끔 하는(몰라서 그렇지, 자주일 수도 있겠네요) '불친절 실수'는 주로 제 기분이 우울할 때 벌어집니다. 결국 저는 기분이 좋으면 친절한 사람이고, 기분이 나쁘면 불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친절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늘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건데,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내 기분과 상관없이 늘 친절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좀 우울한 기분이 들더라도 누구를 만나는 상황이 되면 무조건 "친절, 친절, 친절!" 세 번을 외친 다음 억지로라도 이가 드러날 만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만남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친절의 준비 자세를 갖추는 일종의 주술과 예비동작인 셈입니다. 내 기분에 따라 어떤 사람은 위로받고 어떤 사람은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신기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기적으로 찾아들던 우울한 기분의 정도가 현저히 낮아졌습니다. 잊을 만하면 어김없이 찾아들던 우울이라는 녀석의 방문횟수가 그만큼 줄었다는 얘기입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속담처럼, 친절할 준비를 꾸준히 하다 보니, 내 안의 우울감도 따라 줄어드는 작은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홍창진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