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는 자주 기적이 일어난다. 1962년 칠레월드컵. 소련은 콜롬비아전에서 후반 23분까지 4-1로 크게 앞섰다. 무조건 이기는 경기였다. 소련의 골키퍼가 축구계의 전설 레프 야신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와 소속팀 통틀어 400경기에 출전해 270번 무실점 경기를 달성했고, 151번의 페널티 킥을 막아낸 철벽의 골키퍼. 하지만 경기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야신은 8분 만에 무려 3골을 헌납했다. 이 중에는 코너킥이 그대로 골문으로 빨려 들어간 것도 있었다. 월드컵 역사상 전무후무한 코너킥 실점이 야신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칠레와의 8강전에도 1대2로 패한 소련은 탈락하고 말았다.
성난 팬들은 야신의 집 앞에 몰려와 "물러가라"며 유리창에 돌을 던졌다. 그러나 월드컵의 부진이 경기 도중 뇌진탕 때문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조국을 위해 고통을 참고 골문을 지켰다는 소식에 팬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야신이 선수생활의 위기를 맞았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치 야신의 축구인생이 끝을 향해 치닫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듬해 뇌진탕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다는 듯, 야신은 기적처럼 부활했다. 소련 리그에서 27경기에서 6실점을 하며 최고의 축구선수상인 발롱도르상을 받은 유일한 골키퍼가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02년 우리 태극전사의 월드컵 4강 진출도 기적에 가까웠다. 홈그라운드 이점도 있었지만, 우리 축구전사는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세계 최강을 제물 삼아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었다. 당시 4강 기적의 주역이었던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의 유상철 감독이 '췌장암 4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란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현역시절 골키퍼만 빼고 어느 자리에서도 뛸 수 있다는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 2002년 6월 부산에서 열린 월드컵 D조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한국의 두 번째 골을 넣은 후 환하게 웃던 유상철을 기억하는 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모두에게 기적을 선물했던 그가 이제 기적을 선물 받을 때다"라며 유감독에게 팬들의 응원이 이어지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적이 없다고 여기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으며 사는 것이다." 지금은 유감독에게 야신같은 기적이 필요할 때고, 우리도 그 기적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