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들에게 허무·운명론 선사
전후문학은 그 경험으로부터 출발
가장 비타협적인 배타성 드러내
후대의 '전쟁' 평가 다양한 만큼
역사적 구체 발화한지 70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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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올해 내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잇달았다. 내년은 한일강제병합 110주년, 6·25전쟁 70주년, 4·19혁명 60주년,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등 굵직한 현대사의 모뉴멘트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 지 벌써 70년이 된다. 얼추 셈해 보아도 두 세대 이상이 지나가버린 오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전쟁의 기억도 조금씩 흐려가고, 당대적 경험을 가진 이들은 어느새 고인이 되었거나 노년으로 들어섰고, 이른바 전쟁 미체험 세대조차 중년을 넘어서고 있다. 과연 전쟁은 말끔하게 잊혀져버린 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한반도는 분단의 연장선에 있으니, 종전 아닌 '휴전'의 상황은 여전히 강한 잠재적 압박으로 다가들고 있지 않은가. 이때 우리는 당대적 경험을 치른 이들의 기억에 남은 전쟁의 충격과 해석을 재차 조회함으로써, 전쟁과 문학의 관련성, 더 정확하게는 서정시 안에 해석된 전쟁에 대해 깊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충격을 주었던 전쟁은 전후문학의 존재 근거이자 한계 상황으로 다가왔다. 또한 전쟁은 전후 지식인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허무와 운명론을 선사하였다. 해방 후에 민족 통합의 소망을 가졌던 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한계의식을 경험하게끔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와 한계의식은 당대 시인들에게 전대(前代)와는 확연히 변별되는 정신사적 단절을 부여했으며, 그 결과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환멸과 자기 부정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는 가장 명확한 물리적, 언어적 실체로서의 분단을 경험하게 되며, 남북 문학의 이질화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전쟁과 가난, 반공과 서구 추수라는 공통된 경험을 통해 전후의 시인들은 문학적, 사상적 '아비'를 상실한 채 폐허 속을 거닌다. 그것은 국토 전반에도, 도시 살롱에도, 만취의 육신과 영혼에도, 그들이 써간 문학작품 속에도 두루 걸쳐 나타나게 된다.

이렇듯 우리가 전후에 발표된 문학작품을 역사적, 미학적으로 탐구해보고 거기서 어떤 역사적 연속성을 찾아내려 할 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전쟁이라는 발생론에 대해 탐색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후의 문학적 전개를 전쟁이라는 물리적 힘과 그에 대응하는 정신적 힘의 응전으로 읽는 독법은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부분적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전후의 문학이 전쟁에 대한 응전의 성격을 띨 경우, 그것은 대개 일방적 적의(敵意)로 나타나거나 허무주의에 깊게 침윤된 추상적 인간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당대 서정시에서 전쟁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종군과 참전이라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과 분단에 비판을 가하는 방식이다. 전자는 반공의식, 뚜렷하고 명징한 적의와 강렬한 조국애 등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구상의 '초토의 시'나 조지훈의 '다부원에서' 등은 일방적 적대의식을 넘어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으로 나아갔다. 후자는 분단의 비극성을 비판적으로 조감하되 그것을 민족 통합의 과제와 연관시키는 방식이었다. 박봉우, 신동문, 신동엽 등의 작품들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당대로서는 퍽 소중한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의 비극성과 환멸을 보여준 제3의 목소리도 있는데 김종삼, 전봉건, 정한모, 김규동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전후문학은 한결같이 전쟁이라는 경험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가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 중에서 가장 비타협적인 배타성을 띠는 것이 경험적 인식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일반인들은 물론 창작 주체였던 시인들마저도 경험적 직접성이라는 당대의 지평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어느 유파에 속했든 전쟁으로 인한 경험을 어느 정도 반영하지 않은 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다양한 만큼, 그렇게 다양한 등차를 가지면서 펼쳐진 역사적 기억과 해석의 구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역사적 구체가 발화하기 시작한 지 70년이 훌쩍 지나고 있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