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사제인 '정로환'의 역사는 러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은 중국 선양에서 대규모 전투를 치렀는데 일본 병사들 사이에서 갑자기 설사병이 유행했다. 설사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병사들이 속출하자 일본은 본국에서 지사제를 공수해 병사들에게 먹였다. 그 약의 효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쟁 후 이 약은 '러시아를 정벌한 약'이라는 의미를 담아 '정로환'(征露丸)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됐다. 1970년대 초 국내의 한 제약회사가 일본에서 제조법을 들여와 국내에서 약을 생산·판매하면서는 '정벌'을 뜻하는 '征'을 '바르다'는 뜻의 '正'으로 바꾸었다. '바른 이슬로 만든 약'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20~30년 전 이 약이 설사와는 전혀 무관한, 엉뚱한(?) 용도로 쓰인 적이 있다. 무좀으로 고생하는 이들 사이에서 무좀 특효약으로 인기를 끈 것이다. 많은 무좀 환자들이 정로환을 으깨 식초에 풀어 넣고 수십 분간 발을 담그는 식으로 무좀을 치료했다. 이 민간요법이 얼마나 퍼졌던지, 약국에서 정로환을 찾으면 설사 치료 용도인지, 무좀 치료 용도인지를 묻는 약사가 있을 정도였다. 먹기 쉽게 코팅을 한 개량형 약보다 생약 냄새 풀풀 나는 원래 약이 식초에 으깨기 쉬워 무좀 치료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정로환의 주성분인 크레오소트(Creosote)는 살균력이 강해 장 속의 세균을 죽여 배탈, 설사를 멈추게 한다. 식초의 산을 이용해 화학적 화상을 일으켜 피부를 벗겨내고 크레오소트로 살균하는 방식이 무좀에 통했나 본데, 효과 좋은 무좀약이 널려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는 '원시적'(?)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약이 애초의 개발목적 외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해열·소염·진통제로 개발됐다가 심혈관 질환 예방약으로 널리 쓰이는 아스피린도 그중 하나다.
최근 미국의 말기 암 환자가 개 구충제의 일종인 '펜벤다졸'을 먹고 암을 치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에서도 이 약을 찾는 암 환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유튜브에는 이 약을 먹고 증세가 호전됐다는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반면 완치됐다고 판단할만한 사례가 국내에 아직 없고 부작용 우려도 크다는 게 의학계의 견해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게 암환자들의 심정이다. 더 혼란이 오기 전에 보건당국이 하루빨리 검증에 나서 이 약의 허와 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임성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