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녀노소 불문하고 시대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단어들이 있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영어공부라고는 한 적이 없는 시골 노인들까지 '아이엠에프'를 입에 달고 다녔다. 한일관계가 악화하면서 국가 간에 군사 기밀을 공유하는 군사정보보호협정 '지소미아'라는 이 어려운 말을 아이나 어른이나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 특정 시점의 세태를 반영하는 이런 단어를 유행어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게이트'(gate)도 그런 경우다. 원래 사전적 의미는 '문, 입구, 출입구, 수문, 탑승구'이다. 그런데 1972년 6월 17일 재선을 간절히 원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비밀 공작반을 워싱턴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보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됐다. 그 본부가 있던 건물이 '워터게이트'(Watergate) 빌딩이었다. 그 후 언론은 '정부 또는 정치권력과 관련된 대형 비리 의혹사건이나 스캔들 또는 그러한 불법행위' 등을 말할 때 흔히 'OOO 게이트'로 불렀다.
그런데 이 '게이트(gate)'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수명이 길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부정과 비리가 끊이지 않는 등 건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민정부 이후 김영삼 (김현철 게이트) 김대중(이용호 게이트) 노무현(최도술 게이트) 이명박(내곡동 게이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등 다섯 명의 대통령이 있었지만, 25년간 집권 후반기에 이르면 권력형 비리나 친인척 비리가 터졌다. 그때마다 등장한 게이트는 이제 보통 명사가 됐다.
문재인 정부 집권기 반환점을 지나면서 조국, 유재수, 울산시장 선거 청와대 개입 의혹이 눈덩이처럼 번지고 있다. 이미 여러 명의 권력 실세 실명이 거론되고 있다. 야당의 입에서 '3종 친문 농단 게이트'라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또 불행한 역사와 맞닥뜨린 걸까. 정권마다 터지는 게이트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며 2014년 도입한 것이 '특별감찰관'제도다. '대통령의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과 대통령 비서실의 수석비서관 이상의 공무원'의 비위를 감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제도는 아이러니하게 당시 '친문 핵심'이던 전해철·박범계 의원이 입법 발의했다. 이 제도로 박근혜 정부가 무너졌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공석이다. 문 대통령이 이 자리에 누군가를 앉혔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이래저래 게이트의 수명이 또 연장되게 됐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