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두고 온 가족 생각 못 견뎌
술·담배 즐겼지만 보고픔은 더해
적의 뜰에 있는것같다는 '시집살이'
문학적 역량 따른것은 시댁 조카들
원군있었지만 병 얻어 42세로 생 마감
김호연재(1681~1722)는 고성군수를 지낸 김성달의 딸이며 소대헌 송요화의 부인이다. 그녀는 학문을 중시하는 가풍을 지닌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문학수업을 체계적으로 받았다. 친가는 우의정을 지낸 선원 김상용의 후손이며 시가는 좌참찬을 지낸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이었으니 명문가들의 혼인이었다.
그러나 아들 익흠은 '아버지께서는 할머니를 서울이나 백부의 임지에서 모시고 있느라고 항상 집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쓰고 있고 외손자인 김종걸은 '할아버지께서는 젊어서 호방하여 법도에 매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고결함이 쌓여 마음에 숨은 근심이 있으므로 가끔 시름의 사무친 뜻이 가슴에 있었다'고 쓰고 있어 순탄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을 엿보게 한다.
그녀는 홍성군 갈삼면 오두리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손자 김광현이 식솔들을 배에 태워 피난 내려오다 정착한 곳이 오두리 바닷가였다. 오두리의 후손들로는 김좌진과 김을동이 있다.
김호연재는 그리움의 시인이다. 그녀의 그리움은 언제나 고향에 두고 온 혈육에 닿는다. 그리움을 견딜 수 없어 매일 술을 마시고 담배를 즐겼지만 그리움은 세월 흐를수록 깊어졌다. '한 번에 몇천 리 이별하고/쑥처럼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노라니/십년을 돌아가지 못했네/서로 만나는데 다시 어떤 이유가 있나/만나지 못하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하리/힘들고 어려움이 모두 근심이라네/마음은 고향의 달빛을 따라가니/밤마다 서쪽으로 흐르지 않은 적 없네'라고 노래한 '넷째 형에게 부치노라'에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마음은 달빛을 따라 고향으로 가고 밤마다 오두리를 향해 흐르는 생각을 달랠 길 없어 애달파한다.
그런가 하면 시집살이가 늘 적의 뜰에 있는 것 같다는 괴로움과 회한도 보인다. '암담하고 괴로우니/늘 적의 뜰에 있는 것 같네/다시 만날 인연도 없이/저마다 시집을 가야만 하네/길이 머니 편지를 부치기 어렵고/봄이 깊으니 기러기도 날지 않네/서로 헤어진지 십년이 가까우니/꿈속에서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네'라는 '다섯째 형에게 부치노라'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 안부조차 전할 수 없는데, 혈육들은 꿈속에서도 볼 수 없다고 한탄한다. 시집살이의 신산함과 혈육에 대한 곡진한 그리움이 애처롭다.
'취해 짓다'라는 시에서는 술 취하면 세상이 넓고 마음은 평화롭다고 노래하고 있으나 평상심이 아닌, 취중의 노래여서 안쓰럽다. '취한 뒤에는 천지가 넓고/마음을 여니 만사가 평화롭다/초연히 자리 위에 누웠으니/오직 즐거워 잠깐 정을 잊었네'라고 노래하지만 잠간 잊었던 정이 진정한 정일 것이다.
'부질없이 읊다'라는 시에서 그녀는 '인간의 사십년을 짚어보니/가난과 굶주림과 병과 고통이 연하여 있구나/깊이 궁리를 하는 것과 영예와 치욕은 다 내 운명이니/다만 몸과 마음을 살펴 성현을 배우리라'라고 노래한다. 그녀의 삶은 병고와 가난과 남편의 무관심과 무능으로 가슴에 응어리가 맺힐 수밖에 없었다. 이 시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쓴 시여서 가슴이 아프다. 그녀의 남편은 번번이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실망이 컸다. 뼈대 있는 가문으로서는 치욕스런 일이었다.
시댁을 적국 같다고 노래했던 김호연재의 학문과 문학적 역량을 존경하고 따른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댁의 조카들이었다. 조카들은 김호연재의 원군이었으나 그녀는 병을 얻어 42세에 세상을 떴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