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이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그룹의 모태인 대우 실업을 창업한 건 1967년, 그의 나이 31세였다. 봉제품을 생산해 동남아 미국 등지에 수출하면서 무섭게 외형을 불려 나갔다. 그의 '세계경영'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를 토대로 30년 만에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조선 등 24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2, 3위의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1998년 해외 법인은 396개에 육박했다. 파죽지세로 세계를 정벌하는 칭기즈칸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킴기스칸'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대우신화'라고 했고, 샐러리맨들에겐 우상이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가라.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라"며 일갈했던 그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당대의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집마다 서가에는 이 책이 꽂혔고, 이와 함께 '탱크주의'를 표방하는 대우전자의 TV, 냉장고, 세탁기가 주류를 이뤘다. 샐러리맨들은 첫 자동차로 대우 '르망'을 선택했다. 이랬던 대우그룹의 신화는 1999년 7월 유동성 위기로 그룹이 몰락하면서 막을 내린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그룹이 망하자 한때 '팽창 경영의 모델'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던 그의 세계 전략은 '문어발 경영'으로 평가절하됐다.
대우의 몰락에는 당시 김대중 정부의 오판과 음모가 있었다는 지적은 지금도 끊이질 않는다. 그의 수출 드라이브가 성공하고, 외환위기라는 파도 앞에 허망하게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재계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방만한 경영의 일차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당시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는 충격이었다. 41조 원의 분식회계와 9조 원 부당 대출, 수출대금 20조 원 해외 밀반출 사건이 터지면서 그는 해외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비운의 총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별세했다. 향년 83세. 김우중에 대한 평가는 '돌진형 리더십의 화신'에서 '희대의 사기꾼'까지 극과 극을 오간다. 그의 공과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오랜 기간 논쟁이 지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김우중 이름 석 자를 기억하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기업가 정신이다. 맨주먹으로 세계를 호령했던 도전과 패기, 세계 경영은 당시 한국 경제에 이정표를 제시했다. 당시 청년실업의 해법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해외에서 찾았던 그의 도전정신은 우리에게 영원히 신화로 남을 것이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