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자리 철도청 거쳐 대형백화점
또 다른 곳엔 의과대학·아파트…
과수원이었던 집터 시멘트 포장
분출되는 짜증과 원망으로 가득
집착이냐 포기냐 결단할 수 있을까


경제전망대 조승헌2
조승헌 인천연구원 연구위원
배밭 집 아주머니를 본지 근 30년은 되었을 테다. 광대뼈에 단발머리, 동그란 눈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마지막 상면. 조문은 그렇게 끝났다. 동네를 떠난 지 40년이 넘었건만 어둑해지니 그때 그 시절 친구들이 하나둘 거의 모여들었다. 오고 간 이야기들. 사실도 있고, 여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 단순 '카더라'도 있겠지.

"배밭에 얼씬거리기만 하면 어김없이 그 '세파트(세퍼드)'가 짖어대고 너희 아버님이 문을 열고 나왔지. 그런데 까치가 쪼아 먹은 게 최고로 달고 맛났어."

"배밭 지나 미군 부대 철조망 끼고 신문사 산을 타고 올라 학교 개구멍을 빠져나가던 기억이 새롭네. 수위한테 걸리면 다시 돌아가야 했고."

"지금 그 동네는 사과 과수원이 아직도 있을 거야. 철거시키고 철조망을 쳐서 가보지는 못했지만, 거기로 일을 나가는 형이 그러더라고."

"그런데 이제 미군도 다 떠났으니 부대가 없어지면 우리가 살던 고향은 어떻게 되는 거지?"

동네 뒤에는 한국 보수언론의 최고라 할 그 신문사의 선산이, 능선 저편에는 그 학교가 있다. 아버지로부터 학원과 지역구를 물려받았고, 지금은 전직 대통령을 받드는 정당의 공동대표가 된 보수정치인의 사업장이다. 그 둘과 어깨를 겯고 있는 곳이 미군 부대다. 한때는 군단 사령부로서 지역의 경제와 지역구 국회의원 공천권까지 쥐락펴락했다는 말이 돌던 그 부대. 골프장이 있어 가을에 벼를 베거나 배추를 뽑거나 할 때 골프공께나 줍곤 했었지만, 골프공 팔아 달러 버는 맛에 빠져 학교를 빼먹곤 하던 자식 때문에 부모들은 울화를 끓기도 했다.

그 산. 한북정맥의 지류이다. 양주~의정부~사패산으로 연결되는 김신조 루트가 되었던 곳. 가족이 육이오 전쟁 때 무사히 피란을 마쳐서 고맙다고 신문사가 지어주었다는 교회가 지금도 온빈 한씨와 아들 경평군 묘역이 있는 전주이씨 종중 선산 자락에 있다.

"우리 부모님들, 그 사람들 성묘 온다 하면 천막치고 가마솥 걸어 밥하고 쇠고기뭇국 끓이고 치다꺼리 많이들 했지."

"땅 주인이 온다는데 잘 보여야지. 남이 오랫동안 땅 사용하면 뺏긴다며 나가라 했지만…."

"그런데 그 산소들 만든다고 산등성 다 까고 엄청 유난스러웠지."

"그래서 지금도 그게 불법이니 뭐니 하지만, 누가 거길 건드리겠어."

"부대 안에도 산소하고 땅이 있으니, 부대 떠나면 땅값이 대박을 터트리겠네."

"그래서 한 번 부자는 영원히 부자인 법이야."

"그런 말이 있었던가?"

"… 신조어인가?"

장례식장에서 전철역으로 가는 길목, 여전히 후미진 그곳은 40년이 다 된 야학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역 앞에 있던 미군 부대 그 좋은 자리는 철도청을 거쳐 대형 백화점이 차지했고, 또 다른 미군 부대에는 곧 의과대학이, 고향 동네 미군 부대와 골프장에는 대학교, 아파트, 첨단산업단지가 들어온다지. 거기가 개발되면 과수원과 밭이던 고향의 집터는 아스팔트, 시멘트로 덮이고 예전 상전들이 건물주로 돌아오는 그때 우리는 찾을 수 있을까, 아궁이, 변소, 외양간, 공동 우물, 땅따먹기하던 마당, 공회당과 미루나무, 떠나기 전 댓돌 밑에 증표로 끼워둔 10원짜리 동전 둘.

노력과 기대에 차지 않아 분출되는 이지 가지 성화, 짜증, 원망으로 그득, 그러나 자책과 각성은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우리들. 징하고 거시기하다며 2019년이 우리의 군상과 욕망에 끌끌거릴 만하지. 지금 우리가 이리 애달파하고 갈애하는 것들, 세월이 흘러 인생을 돌아볼 그때에도 여전히 최고의 목표이자 가치가 될 수 있는지, 그때 그런 것이 참 잘했다고 뿌듯해 할 수 있을까. 냉철하게 파헤쳐보고, 집착할지 훌훌 털어버릴지 결단할 수 있으려나. 2019년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건 그리할 수 있는지 우리를 지켜보겠다는 기대와 미련? 송구영신.

/조승헌 인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