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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참전했던 이들의 경험담을 듣다 보면 '전쟁은 인류가 만든 가장 파괴적인 형태의 폭력'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전쟁은 적개심의 대상인 적군은 물론이고, 아군인 자신에게도 파괴적이다. 실제로 총격전을 경험한 베트남 참전용사 중에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식의 자포자기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내놓고 러시안룰렛 게임에 뛰어든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적대감과 비이성적 파괴본능만이 이글거리는 전투 현장에서 누군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다면?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 영국군과 독일군이 '지옥의 참호전'을 벌이던 벨기에 이프로 전선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병사들이 고향에 두고 온 연인이나 가족을 생각하면서 불렀는지 양 진영의 참호 여기저기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양초로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도 등장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한쪽이 먼저 노래를 부르면 다른 한쪽이 '화답송'을 부르는 식으로 캐럴 부르기 릴레이가 펼쳐지기도 했다.

급기야 독일 병사들이 손에 촛불이나 작은 트리를 들고 하나둘 참호 밖으로 걸어 나왔고 영국 병사들도 총을 버리고 그들을 맞이했다. 이들 사이에는 맥주와 담배 등 선물도 오갔다. 생각지도 못한 돌발상황에 당황한 지휘관들마저 축제 분위기를 깰 수 없어 크리스마스에 한해 총부리를 거두기로 신사협정을 맺었다. 양 진영은 각자의 진지 사이에 버려진 '적군'의 시신도 수습해 주었다. 비록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다시 포성이 터져 나왔지만, 이 '기적 같은'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진한 여운을 남겼다. 영화 외에도 다른 매체를 통해 많이 소개된 에피소드인만큼,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듯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기자 또한 'B급 세계사'(김상훈 저)란 책을 통해 독일군과 영국군이 맥주잔을 들고 함께 찍은 사진을 접하지 않았다면, 감동을 주기 위해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했을 것이다. 책에는 영국 일간지 '데일리미러'가 이 사진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내용이 소개돼 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크리스마스에도 우리의 정치권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사협정은커녕, 없는 전쟁도 벌일 태세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온갖 독설과 야유가 난무하는 정치권이 전쟁터보다 더 살벌한 것 같다.

/임성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