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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일 마무리짓고 찾은 대관령
산길 사이에 익숙한 사찰 이정표
고찰연륜 상징 대웅보전 '한눈에'
사천항 거쳐 항구등대 한해 정리
묵은 해 갔으니 새로운 희망 오길


에세이 김인자2
김인자 시인·여행가
겨울 대관령의 백미는 역시 푸짐하게 내려주는 눈(雪)이다. 눈의 매력은 아름다운 것이나 추한 것이나 분별없이 순백으로 평정한다는 것인데, 눈 덮인 산야는 습음으로 몸과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화되는 겨울이 주는 선물이지 싶다. 내가 거주하는 대관령은 국내 스키의 발상지이자 평창 동계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른 눈의 고장이다. 이번 겨울은 11월 하순에 두어 차례 이른 폭설이 내린 후 아직 큰 눈이 없었다. 눈뿐만 아니라 해가 바뀌도록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 덕장에 명태를 걸지 못하는 걸 보면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온은 눈앞에 닥친 현실이지 싶다. 이 고원의 겨울 풍경을 대변하는 건 누가 뭐라 해도 스키장과 고랭지 밭에 설치한 대규모의 황태덕장인데 춥지 않고 눈 없는 겨울 대관령을 상상하는 일은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특히 훈훈한 집안에서 사방에 널려있는 황태덕장으로 휘몰아치는 눈폭풍을 보는 일은 대관령 겨울 풍경 중 압권에 속하지만 올해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보다.

2019년 끝자락과 2020년 새해 시작이 맞물려 있는 요즘이다. 나는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한 해를 정리할 겸 머리를 비울 심산으로 차를 몰아 대관령 옛길로 내려선다. 바다를 보는 것이 목적이지만 바다가 아니면 또 어떠랴. 내리막이 거의 끝나갈 즈음 왼편으로 눈에 익은 첫 번째 보현사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길을 따라 얼마쯤 가다 보니 다시 왼편으로 다른 이정표가 길을 안내하는데 오르막을 올라 막다른 길에 서서 더는 갈 수 없을 때 기다렸다는 듯 방문자를 환영하는 곳이 바로 보현사다. 고요해서 그런가, 겨울이지만 계곡의 물소리는 제법 크다. 사찰을 중심으로 앞에는 보현천이 흐르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주변은 아름드리 노송이 자리하고 있어 고찰의 연륜을 대변하는 듯 한 눈에 봐도 사찰의 규모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보현사는 중정식 산지가람배치 형식을 보여주는데 중정식이란 마당을 중심으로 전각들이 배치된 것을 말한다. 절 입구 보현천을 따라 걷다 보면 보현사를 상징하는 석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방하착(放下着)'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를 지나면 모양이 다른 20여기의 석종형 부도전과 '화광동진(和光同塵)'이 새겨진 바위가 기다린다. 길 오른편에 있는 낭원대사탑비(보물 제192호로 지정)는 신라시대에 보현사를 중건한 낭원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으로 귀부와 탑신, 머릿돌에 해당하는 이수(螭首)가 비교적 잘 보관되고 있다.

이쯤에서 가람배치도를 살펴보자. 이곳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평상심시도, 방하착, 부도군을 지나 시계방향으로 화광동진, 낭원대사탑비, 금강루, 수선당, 동정각, 삼성각, 목우당, 지장전, 영산전, 보현당, 오관당, 지장선원 순이며 목우당 뒤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낭원대사부도탑이 자리하고 있다. 한적하기 만한 법당엔 나이 많은 신도 두 분이 기도를 하고 계신다. 사찰을 한 바퀴 돌고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염불소리를 기대했으나 염불 대신 계곡물소리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 잠시 짧은 겨울 해를 품어보는 것으로 위안을 얻는다.

보현사까지 갔으니 조금 욕심을 내어 성산면 보광리 일대 흩어져있는 우리의 중요 무속신앙의 모태인 6개(보광1리에 4곳, 보광2리에 2곳)의 서낭당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해가 짧아 서낭 둘러보기는 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보현사를 뒤로하고 사기막으로 내려선다. 전에 마을 끝에서 저수지를 본 기억이 있어 찾아갔더니 수면이 얼어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숲을 따라 저수지 주변을 서성거리다 추위에 밀려 물회마을 사천포구로 향한다. 거기까지 갔으니 칼칼한 물회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 늦은 점심으로 물회 한 그릇을 비우고 사천항을 거쳐 소돌해변을 따라 주문진항으로 향한다. 삶이 시들해질 때 갓 잡아 올린 항구의 살아있는 생선을 보는 일은 또 얼마나 삶을 푸들거리게 하던가. 주문진항 등대 아래 바닷바람을 등지고 앉아 한 해 동안 내게 안위를 준 세상의 모든 신들께 감사드리고 서쪽 백두대간 등줄기를 타고 넘는 해를 마중하고 자리를 뜬다. 하나가 가면 다른 하나가 온댔으니 묵은 해가 가면 보다 희망찬 새해가 오지 않겠는가.

/김인자 시인·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