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울분·수심 표현한 작품
망국의 슬픔 노래하며 비애 절제
일제말 견딤으로 파시즘에 대항했던
그 나름의 현실이해 방식이었을 것
지훈은 열일곱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열아홉 되던 1939년 '고풍의상'과 '승무'로 <문장>에 추천을 받았다. 선자(選者)는 정지용이었다. 시집 '고풍의상' 후기에서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애수, 민족 정서에 대한 애착이 나를 이 세계로 끌어넣었다"라고 했듯이, 지훈의 초기시에는 전통적 시어 속에 단아한 민족 정서가 담겨있다. 해방 후 그는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공동시집 <청록집>(1946)을 펴냈으며, <풀잎단장>(1952)을 시작으로 모두 네 권의 시집을 냈다. 해방 후에는 학자 혹은 논객으로서 더 인상적인 활동을 폈다. 그는 순전히 독학으로 문학, 철학, 사회과학을 탐독했고 그 결실 <한국문화사서>, <한국문화사대계> 등 방대한 기획을 실행하였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의 송시 청탁에 대해 "나는 누구든 살아있는 사람의 송시는 쓰지 않는다"라고 거절하였고, 1960년대에는 한일협정 비준반대 교수로 나서는 등, 시에서는 전통적 순수의 세계를 추구한 반면 정치적으로는 지조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나는 그가 남긴 많은 시편 가운데 선비정신과 애수가 함께 깃들인 '봉황수'와 낭만적 풍류가 가득한 '완화삼'을 제일로 친다. 일제 말기에 쓰여진 '봉황수(鳳凰愁)'를 한번 읽어보자.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소리도 없었다. 품석 옆에서 정일품 종구품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에 호곡하리라."
몰락한 왕조의 고궁을 소재로 하여 나라 잃은 울분과 수심을 표현한 작품이다. '봉황수'란 망국의 우수를 뜻하는데, 이는 고궁을 퇴락시킨 요소인 '벌레', '산새', '비둘기'가 곧 망국의 요인임을 암시한다. 방치되어 퇴락한 고궁의 모습과,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친 추녀 끝 풍경은 한결같이 봉황의 모습을 참담하게 만든다. "큰 나라 섬기던 거미줄 친 옥좌"라는 구절은 망국의 요인이 사대주의였음을 암시하면서 '봉황'이라는 환상의 새와 확연한 대조를 구축해준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이라는 구절은, 나라 잃기 전의 왕조 역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을 암시해준다. 푸른 하늘 밑에서 대궐 앞길에 깔아놓은 '추석'을 밟고 가는 그림자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더욱 비감하기만 하다. 그리고 다음 문장들은 "없었다"의 반복을 통해 화자의 비감한 심정을 더욱 고조해준다. 패옥 소리도 들리지 않고, 벼슬의 주인공들도 간 곳이 없다.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느낀 화자의 눈에는 눈물이 복받치지만, 그는 '눈물이 속된 줄'을 깨달아간다.
덧없이 무너진 옛 왕조의 역사를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부질없는 감상(感傷)임을 깨닫는 데서 이 시편은 복고적 향수나 비애를 넘어 예리한 현실인식을 보여주는 데로 나아간다. 망국의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막상 그 비애를 절제할 줄 아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이는 일제 말기에 느림과 견딤의 미학으로 파시즘에 저항했던 지훈 나름의 현실 이해 방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저항정신의 선비, 조지훈의 뜻깊은 탄생 100주년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