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시대 이끈 전설들 청춘들에 롤 모델
재벌 창업자 경영스토리 '슈퍼맨'으로 묘사
탁월한 경영자 불구 밀레니얼들에겐 좌절만
신자유주의 카오스 재연… '新전설시대'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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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미국판 '88만원 세대' 탄생을 예고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동 직후인 2008년 11월 5일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세계 최고(最古)의 경제학 전당인 런던정경대학(LSE) 신축건물 준공식에 참석했다. 여왕은 그 자리에 참석한 세계 일류 경제학자들에게 "왜 금융위기가 발생했나?"라고 물었지만 모두 꿀 먹은 벙어리였다.

2011년 4월 미국 최고의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가 주목받지 못했던 선배 학자들로부터 금융위기 원인을 찾았다고 실토했다. 찰스 킨들버거 미국 MIT대 교수는 1978년에 유명한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를 저술한 경제사학자였다. 하이먼 민스키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 교수는 1990년대 말에 과도한 부채가 자산가치 폭락으로 금융위기를 초래한다는 '금융불안정 가설'을 발표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편집장 월터 배젓은 1873년에 저술한 '롬바드 스트리트'에서 유럽 사람들을 경악게 했던 1866년 금융위기를 분석했다. 이 책이 특히 주목되는 것은 2008년 금융위기가 이보다 142년 전에 발생한 신용공황의 복제판이었다는 점이다. 1866년의 영국 오버랜드거니와 2008년의 미국 리먼브라더스는 각각 은행에서 대출받은 단기자금으로 돈놀이하는 과정에서 고객들에게 부채 폭탄을 안겼다가 막대한 규모의 혈세(血稅)만 낭비했다. 월터 배젓은 "부도덕한 기업이 악(惡)의 뿌리"라고 결론 냈다.

새해 경제전망 기사들이 눈길을 끈다. 서민들의 팍팍한 살림살이가 금년에는 나아질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미국 대선과 중국의 저성장 우려 등 복병이 도사려 예단은 금물이나 작년 세계경기가 워낙 안 좋았기 때문에 올해는 약간 나아질 수도 있어 보인다. 한국경제가 관건이다. 국내외 기관들은 금년 경제성장률이 작년보다 개선될 것으로 점치나 조족지혈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경제가 장기부진에서 헤어날 기미가 없다는 점이다. 한국의 기업가정신도 바닥이다. 빈곤의 악순환 시절에 무(無)에서 풍요를 키운 경제 거인들이 그립다.

지난달 6일 잠실 롯데호텔월드에서 제1회 상전(象殿)유통학술상 시상식이 열렸다. 위기에 직면한 국내 유통산업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한국유통학회와 롯데그룹이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을 재조명했다. 신 명예회장은 귀신보다 무서운 가난의 굴레를 벗고자 19세에 일본에 건너가 고생 끝에 롯데껌을 롯데그룹으로 키워냈으며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한국에 또 하나의 롯데를 만들어서 국내 재벌 5위의 대기업집단으로 부상시킨 살아있는 전설이다.

인류의 과거는 지식의 보물창고이자 가장 생동감 있는 교육공간이다. 런던정경대 모건 위첼 교수는 자신의 경영사 강좌를 수강하는 예비창업자들에게 "CEO가 되려면 경영전문대학원(MBA) 진학보다 역사 공부"를 당부했다. 산업화시대를 이끌어온 전설들의 리얼한 경영경험은 야심찬 청춘들에 롤 모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경영학의 큰 스승 피터 드러커는 한국과 이스라엘의 기업가정신을 극찬했다. 중국인들은 역사를 거울로 간주했다. 당면한 상황을 과거 사실에 비추어 판단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내의 재벌 창업자 경영스토리를 접하면 보통사람들은 감히 흉내낼 수도 없는 슈퍼맨으로 묘사되어 교과서로서의 실효성이 떨어진다. 엄청난 카리스마에다 혹독한 갑(甲)질과 신비주의는 압권이었다. 탁월한 경영자임은 분명하나 밀레니얼들에게 좌절만 안길 뿐이다.

'가구왕' 잉바르 캄프라드의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리더십을 그린 '이케아 스토리'가 돋보인다. 독일 귀족가문의 후예인 창업자 잉바르는 어두운 가족사를 가감 없이 드러냄은 물론 1만원도 안되는 우표 살 돈을 분실했다며 여직원을 혼낸 구두쇠였다. 한 푼이라도 비용을 줄여 판매가를 낮추려는 배려 때문이었다. 또한 임직원들을 자신의 피붙이처럼 대하는 진솔한 가족경영으로 이케아를 세계 최고 기업으로 키워냈다. 신자유주의가 윤리에 기초한 자본주의질서를 파괴하면서 카오스가 재연되고 있다. 새로운 전설시대를 고대한다.

/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