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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학가 운동권에 주체사상을 전파한 '강철서신'의 필자 김영환은 북한 대남방송과 일본에서 출간된 서적을 통해 주체사상에 입문한 자생적 주사파였다. 민족해방(NL) 계열 운동권의 핵심이자 주사파 이론의 대부인 그는 두 번의 밀입북을 통해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관악산 1호'라는 암호명과 공작금을 받아와 민주민족혁명당(민혁당)이라는 지하당을 조직한다.

김영환은 북한 주체사상연구소 학자들과의 토론 끝에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감도 함께 가져왔다. '당과 수령의 오류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느냐'는 요지의 그의 질문에 북한 학자들은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주체사상 이념에 경도된 남한 청년이 주체사상의 성지에서 주체사상의 모순에 직면한 것이다. 주체사상의 무오류성에 환멸을 느낀 그는 결국 1997년 민혁당을 해산하고 북한 민주화를 위한 시민운동가로 전향한다.

최근 정치권에서 진중권 전 동양대교수가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조국 사태 이후 정권과 여당과 진보지식인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 중이다. 진중권은 문재인 정권의 탄생을 기원하고 성공을 지지했던 진보진영의 '내부자'였다. 그런 진중권이 유시민의 조국 옹호를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체주의 선동의 언어'라고 직격했다. 그에게 조국은 더 이상 친구 '국'이가 아니라 타락한 진보지식인의 전형이다. 서초동 조국기 부대를 네오 나치에 비유했다. 정의당을 탈당하고 당이 준 감사패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정권의 검찰 학살을 비난하고, 윤석열을 지지한다. 그를 향해 진보진영은 배신감을 토로하고, 보수진영은 전향의 가능성을 엿본다.

그러나 진중권은 뼛속까지 진보다. 그는 진보의 가치와 정의를 오염시키는 위선, 허위, 아류와 싸우는 것이지 진보의 가치는 소중하게 여긴다. 진중권은 이익을 위해 가치를 포기하는 진보를 가짜로 규정하고 내부에서 봉기한 것이다. 진짜가 배신할 이유가 없고, 보수 전향은 어불성설이다. 김영환은 토론 자체가 봉쇄된 주체사상의 전체주의에 절망해 전향했지만, 진중권은 진영내부의 토론을 원한다.

진중권은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궁핍해진 진보적 가치와 정의의 위기를 알리는 호루라기 역할을 자처한 것으로 보인다. 진보 정권에겐 다행한 일이다. 박근혜 정권과 보수세력은 호루라기가 없어 철저히 망했다.

/윤인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