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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입고 뒷짐을 지고 있는 한 남성을 배경으로 '양육비 미지급'이란 붉은색 글씨가 선명하다. 이혼 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의 신상을 공개하는 온라인 웹사이트 '배드 파더스'의 초기 화면이다. 화면을 내리면 이른바 '나쁜 아빠'의 얼굴 사진과 이름, 나이, 주소, 직업 등 신상정보가 줄줄이 뜬다.

이들의 신상을 공개해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사이트 운영진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개인의 명예 보다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한 판결이다. 실제로 이 사이트로 인해 현재 113건의 양육비 미지급 문제가 해결됐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이희영 작가의 '페인트'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국가에서 버려진 아이를 키워 주는 양육 공동체가 실현된 미래 사회가 소설의 배경이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국가에서 설립한 'NC 센터'에서 19세까지 생활할 수 있다. 그 전에 입양을 원하는 부부가 나타나면 가정을 꾸릴 수 있는데, 아이들이 직접 부모를 선택한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소설 제목인 '페인트'는 아이가 부모를 선택하기 위해 실시하는 면접(parent's interview)을 뜻하는 소설 속 아이들의 은어다. 선택받은 부모는 각종 혜택을 받는 대신 제대로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주인공 '제누 301'의 페인트 과정을 통해 좋은 부모란, 나아가 가족의 의미란 무엇인지를 청소년의 시선에서 질문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소설과 현실 사이에서 뭔가 교집합의 빗금이 읽히기 때문이다. 우선 소설 속에서 정부는 아이를 잘 낳지 않고, 낳아도 키우지 않으려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해지자 국가의 사활을 건 프로젝트로 NC센터를 설립한다. 저출산에 부모의 자녀 방임, 학대 등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과 비슷하다. 또 이번 판결은 기본적으로 당연히 해야 할 부모의 도리마저 사회 시스템의 통제 영역으로 들어왔음을 시사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설에서도 아이를 육체적· 정서적으로 돌보고, 아이를 입양한 부모가 제대로 아이를 돌보는지 감시하는 주체는 시스템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게 우리네 부모의 모습이었다. 인류의 소중한 가치 중 하나인 부성애마저 시스템이 강제해야 하는 과정을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임성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