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듯 없는 듯' 그랬던 경계가
강력한 분리의 국경선으로 작동
삶의 터전 떠나 이동 시작한 사람 등
도착한 곳 시간·조건 사로잡힌 이들

연극이 시작하면 골동품 가게에서 함오일이 아들 함구제를 기다린다. 아내와 며느리도 함께 기다린다. 함구제가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무사히 데려오기를 기다리는 이 시간은 지금처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되는 시간이다. 얼마 전에는 여섯 명이 강을 건넜다.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강을 건너는 사람 수나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 함구제는 최성락, 고은마 부부와 함께 돌아온다.
함오일의 유일한 관심은 돈이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에 관해서는 무관심하다. 국경 조약 체결 이후에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할 뿐이다. "땅을 나누는 거지 사람을 나누려는 게 아니래요"라는 말에도 "땅을 나눠서 갈라놓는 것 자체가 사람을 나누는 거야"라고 답하지만 그 말이 간직한 박탈의 조건과 상태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아니 둔감해야만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 아버지의 고향이 함경도이지만 "나는 중국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의 선친이 지금 강을 건너는 사람들처럼 과거에 이곳에 도착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생계를 이어가는 데 어떤 보탬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성락과 고은마는 위장한 부부이다. 강을 건너 골동품 가게까지는 도착했으나 이곳은 종착지가 아니다. 도착할 곳 없는 곳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보다 앞서 강을 건넌 여섯 명이 궁금하다. 내일 자신들의 모습이 아닐 수 없는 여섯 명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함씨 일가가 가장 답하기 곤란한 물음이다. 뒷돈을 받으며 가게 일을 눈감아 주던 중국 공안이 세 배나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 곤란한 물음이다. 여섯 명 중 한 명으로 짐작할 수 있는 부랑자의 출현에 함오일이 대응하는 방식이 그것을 말해준다. 함오일은 제거라는 말 아닌 다른 말로 부르기 힘든 방식으로 그를 처리한다. 골동품 가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듯.
최성락과 고은마는 어느 곳에 가 닿았을까. 사천과 운남을 지나 치앙마이까지 가려던 최성락은 어디쯤에 있을까. 강릉에 가려던 고은마는 어디까지 이동했을까. 두 인물이 겪을 이후의 서사가 궁금함이 아니라 허망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최성락을 넘기기로 한 중국 공안과의 거래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골동품 가게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은 연극이 시작하는 장면과 같은 장면에서 끝난다. 함오일이 아들 함구제를 기다린다. 아내와 며느리도 함께 기다린다. 그 장면에서 연극은 끝난다.
그러므로 관객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과연 함구제는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올까. 관객은 답하게 될 것이다. 최성락, 고은마 부부의 이야기와 그에 앞서 강을 건넌 여섯 명의 이야기를 어떤 입장에서 보는지에 따라 그 답을 얻게될 것이다. 그리고 연극이 끝난 이후 극장 바깥의 세계로 눈을 돌릴 것이다. 현재에도 도착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는 현실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국적국을 떠난 사람들, 난민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사람들이 2천590만명(2018년)이 넘는 현실에 대해.
연극 '수정의 밤'은 미완의 도착에 관한 연극이다. 삶의 터전을 떠나 도착할 곳 없는 이동을 시작한 사람들, 방문도 아니며 체류도 아니며 통과도 아닌 것으로 도착하는 사람들, 그로 인해 셈해지지 않으며 더 이상 어떤 권리도 주어지지 않아 그저 도착한 곳의 시간과 조건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