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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 되기전 여행 '호동서락기' 남겨
김덕희 소실로 들어가 용산서 생활
박죽서 등과 여성시동인 이끌기도
남편 죽자 삼호정 떠나 고향 원주로
섬강 서서 '지난 날' 풀어보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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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시인
그해 삼월이었으니 섬강은 진달래꽃 흐드러진 강안의 풍경을 모두 담고도 흐름이 더디었을 것이다. 강물은 조용하여 먼 산수유 노란 꽃그늘을 부르기도 하고 아스라이 등성이로 사라지는 산길을 부르기도 했으리라.

금원은 소복을 벗지 않고 삼강에 섰을 것이다. 섬강은 금원의 유년의 강이어서 어린 날들의 아름다운 기억을 담아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 김덕희를 떠나보낸 정월의 용산 삼호정은 스산하고 춥고 시렸을 것이다. 그녀는 삼호정에서 백일을 울고 그곳을 떠나 고향인 원주 봉래산 기슭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녀는 지난 날들의 섧고 아리고 쓰라렸던 기억과 아름답고 미쁘고 벅찼던 추억을 모두 풀어 보내려고 섬강에 섰을 것이다. 섬강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무거워지는 산색을 안고 조용히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두워지고 그녀의 소복만 오래도록 섬강에 비겼을 것이다.

금원(1817-1853 이후)은 원주의 몰락한 양반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녀는 어떤 글에도 가문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운명적으로 기녀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금원은 기적에 오르기 전인 1830년,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남복을 하고 금강산과 서울과 강원도와 충청도를 여행하고 그 후 평안도에서 살아보고 나서 1850년, '호동서락기'라는 여행기를 남긴다. 그녀가 살아서 남긴 마지막 글이다. 생몰연대를 1853년 이후라고 말하는 것은 남편 김덕희의 죽음이 그 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호동서락기'에 여러 편의 시를 남기고 있다.

여행기의 첫 시는 제천 의림지를 보고 지은 연시다. '호숫가 버들은 푸른 실처럼 늘어져/봄날 암담한 마음을 아는 것일까/나무 위 꾀꼬리 하염없이 우니/임 보내는 슬픔 이기지 못하겠네'라고 읊어 별리의 아픔을 보인다. 금강산 유점사는 그녀로 하여금 또 다른 흥취를 부르게 했다. '낭떠러지 하늘가 암자 하나/산 북쪽 맑은 종소리 남쪽까지 울리네/흰 구름 일어 흩어지니 골짜기가 눈 앞에 펼쳐지고/밝은 달은 연못 속에 고요히 잠겼구나/부질없는 꿈에서 불현듯 깨어/고요히 부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네/오십삼 부처 계신 맑은 이곳에 서/오래도록 영험한 지혜의 등불을 밝히고 싶구나' 열네 살의 깨달음이 심상치 않은 시편이다. 금강산을 나와 올라간 곳이 함경도 원산이다. 명사십리의 해당화를 놓칠 수 없어 시를 남긴다. '봄은 가고 꽃 이미 졌는데/해당화만이 붉게 피었구나/이 꽃마저 지고나면/헛되고 헛된 봄날이여'는 열네 살의 정서는 아니다. 되돌아 내려오며 여행한 곳이 강원도의 관동팔경이다. '평해로 향하다가 월송정에 올랐다.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잠잠하고 날씨가 청명하여 섬들을 바라보니 있는 듯 없는 듯 바다색이 하늘에 닿아서 구름 끝을 볼 수 없었다. 차가운 이슬에 뜬세상의 삶이 참으로 가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그녀는 '호동서락기'에 적는다.

이어서 서울행이었다. 북촌의 삼청동을 거닐며 시 한 수를 떠올린다. '온갖 꽃 핀 아침 조그만 누각이 환한데/또각또각 발소리 날개 단 듯 가볍다/복잡한 생각을 다 씻어 없애니/산에 가득한 안개는 저 멀리 펴져 있네'. 그녀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시였으며 깨달음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금원은 관기로 양반들의 모임에 불려나가면서 김덕희를 만나 그의 소실이 된다. 남편이 의주 부윤을 그만두고 낙향했을 때 금원은 남편의 별장인 용산의 삼호정으로 내려와 '삼호정시사'라는 여성시동인을 이끌었다. 여기에 참여한 여류 시인이 박죽서, 김운초, 김경산, 김경춘이다. 여인들은 선녀였다. '봄뜻으로 서로 만나 고운 놀을 아끼며/버들눈썹 처음 펼치니 예스런 뺨이 곱기도 하여라/시를 찾으며 꽃 보는 복을 마음껏 누리니/누가 선녀들에게 베틀 일을 쉬라했나'는 동인들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삼호정시사는 죽서의 죽음으로 해체된다. 김덕희가 동지사로 중국을 다녀온 후 자리에 눕게 되고 금원의 정성 어린 간호에도 세상을 뜨면서 금원은 삼호정을 떠난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