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루엔자 보균자가 대도시에 잠입한다. 호흡기로 전파되며 감염 속도 초당 3.4명. 치사율 100%. 전에 볼 수 없었던 신종 바이러스로 사망자가 속출한다. 정부는 국가 재난사태를 발령, 급기야 도시 폐쇄라는 초유의 결정을 내린다. 피할 새도 없이 격리된 사람들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대 재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목숨 건 사투가 시작된다. 2013년 개봉한 영화 '감기'는 신종 전염병 공포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재난영화다. 당시 의학 전문가들은 영화적 상상력의 소산으로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보다 더 끔찍했다.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18년 여름, 프랑스 주둔 미군 병영에서 독감 환자가 발생했다. 처음엔 감기와 증상이 비슷해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미군들이 속속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감염자가 급속하게 확산해 미국에서만 무려 50여만명이 사망했다. 물론 유럽 대륙에서도 사망자가 속출했다. 영국에선 25만명, 프랑스에선 40만명이 숨졌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등 유럽의 유명 화가들도 피하지 못하고 희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신종 바이러스가 4개월 후 아시아를 덮쳤는데 식민지 치하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총독부 연감을 보면 당시 인구 1천678만 명의 절반에 가까운 740여만명이 감염돼 14만명이 사망했다. 이른바 1918년 '무오년 독감'이다. 하지만 이는 추정치에 불과하다. 당시의 허술한 통계를 고려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12월 3일자 매일신보의 기사가 이를 증명한다. '서산군에만 8만명의 독감 환자가 있고, 예산·홍성서도 야단이다. 감기로 사망한 사람이 2천명이나 된다'.
지금까지 한 세기 동안 서너 번씩 신종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했다. 200만명이 사망한 1957년 아시아 독감, 100만명이 사망한 1968년 홍콩 독감, 1979년 에볼라 바이러스, 2000년대 사스, 메르스가 그런 경우다. 이것들이 무서운 건 신종(新種)이라 치료 약을 늘 앞서서 나간다는 점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우한 폐렴 공포가 경기도를 덮쳤다. 이제 무엇보다 2차 감염을 차단해야 한다. 쓸데없는 괴담 확산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확하고 신속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지금은 정부가 국민에게 신뢰를 주어야 한다.
/이영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