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신생아 미래 책임 못지고
경제는 산모 배려 못해 출산 회피
젊은세대들 부모세대 가치관 수용
'비혼·독거주의' 실행으로 옮겨
삶의 본질에 대한 이해폭 넓혀야


2020020301000110800005991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중국 우한에서 발원했다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섭기는 무섭다. 하지만 한국의 놀라운 자살률, 인구 감소세에 비추어 보면 그렇게 무서운 것만은 아니다.

프레시안에 실린 한 칼럼은 한국의 출산이 매년 1만 내지 5만씩 감소해 가고 있다고 했다. 이 글을 쓰신 이상이라는 분은 인구 통계를 상세하게 인용했다. 보통 합계 출산율이 2.1은 되어야 인구의 현상 유지가 가능하고, 1.7 이하가 되면 저출산, 1.3 이하가 되면 초저출산이라고 한다. 한국은 이미 1985년부터 저출산 상태였고, 2002년부터는 초저출산 상태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국제통화기금 총재를 지낸 사람이 이 인구 감소 추세를 들어 한국을 '집단자살 사회'라고 했다고도 한다. 어째서 이런 '비극적 현상'이 연출되기에 이른 것일까?

요즘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등장하는 대통령 시대에 지도자들은 근대화만이 살길이라고들 외쳤다. 그 근대화는 '수출 백억 불 달성' 같이 물량적인 수치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급증하는 인구는 이러한 경제적 성장을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되었다.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1970년대의 표어는 근대화와 인구 사이의 부조화 또는 반비례 관계를 압축적으로 가르쳐 주는 표어였다. 물질주의적 근대화 전략은 생명의 탄생을 가난을 불러들이는 '저주'처럼 인식하여 출산을 강력하게 억제하려 했다.

이 물질주의적 근대화 전략은 1970년대 내내 가혹한 노동조건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노동을 행하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생명들인데 이 생명이 근대화라는 예정 지향적인 전략에 의해 억압, 훼손되는 일들이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물질주의에 대한 저항을 이념적으로 '완성한' 1980년대의 마르크시즘 운동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물질주의였다. 물량적 팽창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적 근대화주의에 계급적 갈등을 중심으로 한 물질주의적 치유 전략이 팽팽하게 맞선 것이 바로 1980년대의 한국 사회였던 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것이 1980년대의 사회 변혁 운동의 약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주역들은 정치 체제를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기는 했지만 경제 체제를, 그것을 운용하는 근대화주의적 전략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고, 그 체제 안에 '포섭'되어 적응하고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그들이 저항했던 물질적 근대화주의의 인구 표어를 극단적으로 진화시켜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들 했다. 국가가 권장하기 전에 먼저 386세대 스스로가 알아서들 하나만 낳고자 작정했고, 더 '진보적인' 사람들은 출산이나 결혼 자체를 거부했다. 국가가 신생아들의 미래를 책임지지 못하고 경제체제가 산모들을 배려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출산이 가능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제 2010년대의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의 가치관을 급격히 '수용'하여 '비혼주의'와 '독거주의'를 실행에 옮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새로운 자아주의를 실천하는 젊은 세대들의 다음 세대는 어떤 또 다른 실천을 감행할 것인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복지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은 부당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필자의 눈에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그것은 물질주의에 대해 물질적 보상으로 문제를 풀자는 해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삶의 본질과 본령에 대한 이해가 사회적으로 신장되어야 한다. 삶이 생명이요, '자아'의 쾌락과 행복만으로는 이 생명을 지속시켜 갈 수 없음을 사회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삶의 연속이 만들어가는 문화와 전통과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 경제적 보상을 위주로 한 복지 정책만으로는 상황을 바꿀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개체들은 자신들이 포함된 '공동체'에 대한 신뢰감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개체들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이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생명은 자손을 낳아 번성함으로써 지속되는 것이다.

올해는 경자년, 쥐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올해는 사람들의 삶이 어느 때보다 넓게 펴지고 두터워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