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으로 들어오는 중국발 비행기들2
인천공항 '중국 전용 입국장'  인천국제공항에 중국 전용 입국장이 설치된 4일 오후 제1여객터미널에 중국 선전 바오안 국제공항에서 출발한 항공기가 도착했다. 이날부터 후베이성 여권 소지자와 지난 14일간 후베이성에서 체류한 바 있는 외국인은 입국을 제한하며 중국발 항공기를 이용한 입국객들은 검역 확인증을 발급받게 된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전염병 지역서 입항 상륙 금지"
1896년 '온역장정' 현재와 비슷
월미도·답동에 격리소 '피병원'
1907년 흑사병 차단 해항검역소


인천이 공항·항만 등 검역 최전선에서 벌이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사투는 관문 도시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외래 바이러스의 침투를 막기 위해 겹겹이 방역망을 치고 첨병에 나선 무거운 책임감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1883년 개항한 인천항은 외국 선박을 타고 온 사람과 물자, 문물이 드나드는 통로였지만 외래 감염병의 유입 경로이기도 했다. 개항 이후 국제 검역의 필요성이 요구됐고, 지금 검역체계의 골격이 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검역규칙 '온역장정(瘟疫章程)'이 1896년 만들어졌다.

100여년 전 규정을 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는 지금의 인천국제공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염병의 기운이 있는 지방에서 입항하는 선박의 선원과 승객은 임의로 육지에 오를 수 없다"는 조항은 4일부터 시행하는 중국발 항공기 승객에 대한 우리 검역 당국의 입국 제한 조치와 비슷하다. 정부는 이날 0시부터 14일 이내에 후베이성을 방문한 모든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그때도 "선박 내 역증(疫症)이 있는 경우 해관 의사가 지정하는 원처(遠處)로 이동"하도록 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국가지정 격리 병실에 이송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에는 '피병원(避病院)'이라 했다. 전염병 환자를 일반 주민들을 피해 격리하는 병원을 말한다.

1890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자 우리나라는 나가사키 경유 선박에 대한 검역을 강화했고, 이때 월미도 남쪽에 환자 6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피병원을 세웠다.

당시 해관 업무는 사실상 열강의 지배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보다는 자국민의 보호가 최우선이었다.

지금의 신포동에 해당하는 조계지(외국인 거주구역)와 직접 닿지 않는 월미도 한 구석에 격리병원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인천은 1898년 당시 도시 외곽이었던 답동에도 피병원을 세웠는데 혐오시설이었던 탓에 이 시설은 도시 확장으로 계속 밀려나 도원동까지 갔다.

해방 후까지 인천 전염병 관리를 했던 '덕생원'이 바로 도원동 피병원이다. 덕생원 언덕 아래를 흐르고 있던 개천의 다리를 '독갑다리'라고 불렀는데 인천의 향토사학자 신태범은 '인천한세기'에서 "음산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고 했다.

인천에 검역소가 본격 운영된 때는 1907년 만주에서 흑사병이 창궐하자 대월미도와 소월미도에 해항검역소를 세우면서부터다. 1911년에도 인천항에 검역소가 세워졌고, 이때부터 100년 넘는 기간 검역의 최전방을 지키고 있다.

선박 중심의 검역 체계는 2001년 인천국제공항의 개항으로 항공기로 확대됐다.

김포공항검역소가 2001년 3월 29일 인천공항으로 이전했고, 2011년에는 인천공항의 내외국인 입국자의 전염병 감염환자를 격리해 치료하는 중앙검역의료지원센터가 인천공항 국제업무단지 인근에 설립됐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