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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가 시를 쓰던 시절만 해도 가난은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가난은 더는 시인의 무기가 아니다. 그래도 함민복은 시 '긍정적인 밥'을 통해 시인의 가난을 이렇게 은유적으로 노래했다.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너무 박하다 싶다가도/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국밥이 한 그릇인데/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시집이 한 권 팔리면/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박리다 싶다가도/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몇 해 전 최영미 시인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연간소득 1천300만원 미만의 무주택자라 생활보호 대상자가 됐다"며 "세무서로부터 근로장려금을 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비참한 생활고를 밝힌 적이 있다. 50만권이 넘게 팔린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인의 슬픈 고백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시인만 가난한 게 아니다. 몇몇 스타급 예술가를 빼곤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봉준호 감독도 무명시절 영화 '호텔 선인장' 조연출을 하면서 1년 10개월 동안 650만원의 연출료로 생활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가난한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형 앵테르미탕' 를 도입하겠다는 총선 공약을 내놨다. '불규칙적' 이란 뜻의 '앵테르미탕'은 문화예술인의 생계 안정을 위해 프랑스 드골 정부 때부터 시행하고 있는 실업급여제도. 봉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에 얹혀가겠다는 얄팍한 속셈이 뻔히 보이는데, 미안하게도 이 공약이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이미 우리에겐 '최고은 법'이라는 예술인복지법이 있기 때문이다.

2011년 1월 33세의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은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다면 저희집 문 좀 두드려 달라'는 쪽지를 남긴 채 굶주림에 시달리다 세상을 등졌다. 충격적인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가난한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돕겠다며 당시 이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났어도 예술인들의 가난은 도무지 나아진 것이 없다. 선거를 앞두고 마구 쏟아내는 포퓰리즘 공약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또 한 번 상처를 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영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