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선진국에선 선거를 코앞에 두고 '공천 물갈이'나 '공천 학살', 심지어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자객 공천'같은 반민주적인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리 권한이 막강한 당 대표라 해도 지구 당원 의사에 반해 마음대로 현역 의원을 잘라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처럼 안정된 민주사회에선 누구든 소속정당의 지역활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 자연스럽게 의회로 진출하게 되고, 심지어 총리도 할 수 있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도 그랬고 존 메이저도 테리사 메이도 그랬다. 이들은 물갈이 공천으로 정치에 참여한 참신한 인물도 아니고, '영입'으로 입당한 인물도 아니다. 지역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경력을 쌓아 지역 주민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의회에 진출해 총리까지 올랐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물갈이'와 '영입'이란 단어가 거부감 없이 쓰이고 있다. 현역의원이 버젓이 있는데도 '전략 공천'이란 핑계로 영입인사를 특전사 낙하산 부대처럼 지역구에 마구 떨어뜨린다. 이러니 지역에서 묵묵히 활동했던 정치 지망생들에겐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비민주적이고 후진적인 정치문화가 아닐 수 없다. 말로는 '시스템 공천''상향 공천' 운운하지만, 실제 선거가 임박해서는 모든 규칙은 무너져 뒤죽박죽이다. 이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여야 모두 '물갈이'와 '영입'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이념도 노선도 찾아볼 수가 없다. 지구당과의 협의라든가 지역 정서 같은 것은 아예 무시된다. 국회의원 한 명이라도 더 당선시키기 위한 절박한 전략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지만, 표만 얻을 수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는 식이다. 여기에 '험지 출마'라는 말이 덧씌워져 '물갈이 공천'이 자연스러운 용어가 돼버렸다. 종편 등 TV 출연으로 약간의 지명도만 있으면 아무 지역이나 마구잡이로 내려보내는 게 일상화가 됐다.
교과서 같은 얘기지만, 정당이 제구실하려면 무엇보다 지역 주민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지금같이 선거가 임박해서 펼치는 공천의 행태는 정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인스턴트 정치'에 불과하다. 내가 사는 지역의 골목길을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급하게 주소를 옮기고 정당 공천을 받아 금배지를 단다 한들, 이를 지역 대표라고 하기는 어렵다. 선거를 앞두고 늘 반복되는 이런 '공천 놀음'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그저 한심할 뿐이다.
/이영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