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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음악만큼 영화에 많이 쓰이는 경우도 드물다. 줄스 다신 감독의 '페드라'도 그중 하나다. 1962년 작. 국내 상영시 제목은 '죽어도 좋아'였다. 앳된 알렉시스 (안소니 퍼킨스 분)가 스포츠카를 몰고 '페드라!' 를 외치며 죽음을 향해 절벽 너머로 질주하는 엔딩은 지금 봐도 가슴이 저민다. 그때 흘러나오는 곡이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다. 영화는 미국과는 달리 유럽과 한국에서는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이유가 있다. 페드라역을 맡은 멜리나 메르쿠리의 농염한 연기 덕분이다. 그리스 출신인 그녀는 다신 감독의 아내이며 그리스 민주화의 영웅이기도 했다. 훗날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문화부 장관도 지냈다.

배우로서 전성기였던 1962년 메르쿠리는 런던을 방문했다가 대영박물관에서 '엘긴 마블'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엘긴 마블'은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외벽에 만들어진 수십 개의 사람 모양 조각을 비롯한 200여 점의 그리스 조각물. 영국은 이 조각물들을 1801년부터 1812년 사이 부조 길이의 절반에 해당하는 구간을 통째로 뜯어내 대영박물관에 전시해 왔다. 당시 그리스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 조각물을 런던으로 이송하는 작업을 주도한 사람이 오스만제국 주재 영국 대사 토머스 엘긴이었다.

메르쿠리는 장관이 된 후, '엘긴 마블'이 그리스로 돌아오면 전시할 박물관까지 지어놓고 반환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1994년 74세 일기로 눈을 감는다. 다신 감독은 아내를 기리며 '멜리나 메르쿠리 재단'을 설립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 문화재의 반환운동을 주도했지만, 그 역시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8년 세상을 떠났다.

'엘긴 마블'을 둘러싸고 그리스와 영국은 오랜 시간 갈등을 빚어왔다. 그리스정부의 반환 요구에 영국 정부와 대영박물관 측은 '엘긴 마블'이 그리스만이 아닌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이며, 대기오염으로 악명높은 아테네에 돌려줄 경우 훼손이 우려된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내세우며 반환을 거부해 왔다. 하지만 영국이 EU(유럽연합) 탈퇴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조짐이 보인다. 영국과의 무역 협상을 준비 중인 EU 27개 회원국 측이 협상문에 '영국이 불법적으로 약탈해간 문화재를 반환해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국민은 물론 메르쿠리의 평생소원이던 '엘긴 마블'의 귀환이 이뤄질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이영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