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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5번 제목은 '운명'이다. 1악장 첫 네 음표는 너무 강렬하다. 베토벤 스스로 이 네 음표를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고 했다는데, 정설은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전 악장에서 변주되며 반복되는 이 소절로 5번 교향곡은 제목에 걸맞은 '운명'의 서사를 완성한다.

운명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초인간적인 굴레다. 실향의 운명을 예상한 이산가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패륜도 운명의 장난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아버지의 복수를 고민하는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라며 운명의 굴레를 쓸지 말지 번민한다. 운명의 세 여신의 물레에 매달린 인간의 운명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다. 누군가 운명을 거론하면, 숙연하게 경청하기 마련인 이유다.

설명할 수 없는 인생사 역시 곧잘 운명으로 귀결되곤 한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 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 마지막 부분이다. 문 대통령은 '적당히 안락하게 살았을지 모르는' 삶이 친구 노무현을 만나 각성됐다며, 노무현과 문재인의 운명적 동반을 서술했다.

그래서일까. 노무현-문재인의 운명적 연대에 감화된 추모, 추종자들은 스스로 운명공동체로 여기는 강한 결속력을 보여준다.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조국 전 장관에게 그토록 관대했던 것도 운명공동체의 무조건적 연대가 아닐까 싶다.

최근 대통령이 중국을 운명공동체로 강조했던 지난 어록들이 화제다. 대통령의 한·중 운명공동체론이 코로나19에 대한 근본 방역대책인 중국인 입국금지를 지연시킨 결정적 원인이라는 비판 때문이다. 일부에선 한·중 운명공동체론이 팩트가 아니라지만, 중국을 향한 대통령의 언행이 한·중 운명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대통령은 야인 시절 노무현의 숙제에 갇힌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그러나 이젠 대통령의 운명이다. 그의 운명은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의 운명을 진영에 가두면 안되고, 중국과 섣불리 운명을 공유해도 안되는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의 운명은 철저히 국가와 국민에게 고박되어야 한다. 그게 문재인 대통령의 운명이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