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권은 외국을 여행하는 국민에게 그 나라 정부가 발급하는 국제신분증이다. 외국에 나갔을 때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여권의 권위는 사전 비자 없이 여행할 수 있는 나라 수가 몇 개냐에 따라 결정된다. 영국 컨설팅그룹 헨리앤드파트너스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최신 여행 정보 데이터를 바탕으로 분기마다 '헨리 여권지수' 순위를 발표한다. 사전 비자 없이 방문 가능한 외국 국가 수에 가장 큰 점수를 주고, 국가의 신뢰도, 개인 자유 수준 등을 합산해 순위를 결정한다. 두 달 전에 발표된 지난 4분기 세계 199개국의 여권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189개국으로 독일과 함께 공동 3위에 올랐다. 1위는 일본(191개국), 2위는 싱가포르(190개국)였다.
여권지수만 놓고 볼 때, 우리는 세계 톱 클래스 국가다.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시작된 걸 고려하면 30년 짧은 시간에 대단한 일을 해낸 셈이다. 이 모두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나라 위상도 높아진 덕분이다. 지난해 말 기준 우리나라의 무사증입국 국가는 171개국. 자랑이라고 하기엔 쑥스럽지만, 여권밀매업자들에게 가장 비싸게 거래되며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게 한국 여권이다. 누가 뭐래도 여권은 국력의 척도다.
하지만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일이다. 그제 인천에서 출발한 하노이행 아시아나 항공기가 이륙한 지 40분 만에 인천공항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아예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베트남 당국이 29일 0시부터 한국인에 대한 무비자 입국을 임시 불허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조치는 한국인에게 15일간 무비자 입국을 허용했던 2004년 7월 이후 16년 만에 처음이다. '박항서'를 떠올리면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정상국가다.
코로나 19 확진자가 확산하면서 한국인의 입국 금지·제한 국가가 79개국으로 늘어났다. 외교부가 각국에 자제를 요청하고 있지만, 확진자 증가에 따라 매일 3~5개국씩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 대한민국 여권으로 비자 없이 무사 통과했던 나라들이다. 그렇다고 이들 나라에 "의리 없다"고 항변할 수는 없다. 자국민 보호를 위한 그들의 조치는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물밀 듯이 몰려 오는 자괴감이다. 초기 대응을 못한 무능함 말이다. 최고의 여권 지수를 자랑하던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점점 고립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영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