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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는 대공황의 후폭풍에 시달리는 193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에 사는 농부 조드 일가가 하루 아침에 비참한 이주 노동자로 몰락하는 과정을 통해 참혹했던 당시 미국의 현실을 그려낸 작품이다. 대공황 이후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알알이 맺힌 분노가 얼마나 컸던지, 소설은 출간 즉시 43만권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듬해인 1940년 존 포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일자리를 찾다 지친 헨리 폰다의 분노 표정 연기가 얼마나 처연했던지 지금도 중장년층의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작품에서 포도는 민중의 고통과 분노를 의미한다. 스타인벡이 분노를 포도에 비유한 것은 처음엔 작은 알갱이로 시작해 시간이 흐르면서 커다란 포도송이가 되듯, 작아 보이는 개개인의 분노도 함께 모이면 큰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는 출판 초기 '계층 간의 반감을 조장해 폭동을 선동하는 공산주의 소설'이란 소릴 들으며 금서로 지정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분노의 포도'가 절망으로만 읽히는 것은 아니다.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뒤늦은 자각과 연대야말로 황석영의 소설 '객지'의 마지막처럼 그것은 '희망'과 다름 없다.

코로나19 사태로 국민들이 '일상이 정지했다'고 느끼고, '분노'가 매우 증가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연구팀이 2월 25~28일 전국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4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일상이 절반 이상 정지했다'고 응답한 비율이 59.8%, 코로나19 뉴스를 접할 때 떠오르는 감정으로는 '불안' (48.8%), '분노' (21.6%)를 꼽은 비율이 높았다. 이는 1월의 1차 조사 때보다 큰 폭으로 증가한 수치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국민의 분노가 작은 알갱이에서 시작해 점점 커다란 포도송이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스크 수급 대책 하나 제대로 수립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무능으로 국민의 분노가 폭발 직전에 놓여있다. 마스크를 사기 위해 판매처마다 새벽부터 줄 서 기다리는 국민의 얼굴에서 우리는 '분노의 포도'를 읽는다. '사람들의 눈에 패배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 분노가 서린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의 포도가 한가득 가지가 휘게 무르익어 간다. 수확의 때를 향하여 알알이 더욱 무르익어 간다'.

/이영재 주필